팥죽 한 그릇

by ok란



햇살이 따스한 오후, 해를 머금은 장미공원에 올랐다.

공원으로 올라오는 길에 붕어빵을 사들고 벤치에 앉았는데 할머니 한 분이 계셔서 붕어빵을 권하자 배가 아파 못 먹는다고 조용히 웃으신다.


잠시 뒤 웬 할머니 한 분이 스티로폼 상자에 무언가 끌고 오는 것을 보고 나는 운동하러 자리를 떴다가 돌아오니 할머니가 상자를 뜯고 있었다. 그 상자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팥죽이 들어있었다.

그냥 갈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입에 침이 고인다.

팥죽을 꼭 먹고 싶었다.

“팥죽 맛있겠어요 저도 주시면 안 될까요?”

하면서 할머니에게 말을 하니 종이컵에 팥죽을 떠 주셨다.

한 숟가락 입에 넣는 순간, 오래전 어머니가 끓여 주시던 그 맛이 입안에 되살아난다. 몇 숟가락 뜨지 않았는데 금세 팥죽이 없어졌다.

더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 마음을 읽으셨는지 옆에 있던 할머니가 웃으며 한 컵을 더 덜어주셨다.

고마운 마음에 정말 맛있게 팥죽을 먹었다.


조금 후 몇 명의 할머니들이 모이더니 어느새 작은 잔치마당이 펼쳐진다.

공원 한쪽에서 펼쳐진 이 소박한 풍경은 마치 시골 마을의 오래된 정을 다시 보는 듯하다.

큰 냄비 한가득 끓여 오신 할머니의 손길에서 이웃을 향한 마음이 듬뿍 느껴진다.

마치 고향에 살던 할머니들을 보는 느낌이 든다.

동짓날이면 맛보던 팥죽을, 오늘 공원에서 뜻밖에 맛보게 될 줄이야…….

약속도 없던 시간과 장소에서 만난 한 그릇의 팥죽은 그 자체로 행운이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겨울 추위에 동지 팥죽을 먹는 이유는 팥이 몸을 따뜻하게 해 주는 효과가 있는 겨울 전통 음식이라 한다.

또한 옛날부터 팥죽을 쑤어 조상께 제사를 지내고 대문이나 벽에 뿌려 귀신을 물리치는 새해의 무사안일을 빌던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팥죽을 먹다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팥죽할멈과 호랑이’ 이야기가 떠오른다. 어느 날 팥밭에서 김을 매던 할머니 앞에 호랑이가 나타나자, 할머니는 먹을 것이 귀하니 눈 내린 겨울에 다시 와 팥죽을 실컷 먹고 잡아가라고 했다. 다음 동짓날 이 소식을 듣고 우는 할머니를 도우러 자라, 송곳, 돌절구, 멍석, 지게가 모여 호랑이를 물리쳤다는 이야기다.

오늘따라 공원에 할머니들이 팥죽 먹는 모습을 바라보니 어머니가 생각난다.

어머니는 동지 전날부터 준비한 팥죽 재료로 새벽부터 분주하게 팥죽을 쑤었다.

팥을 삶아 거르고, 찹쌀가루를 익반죽 하여 새알을 만들고 거른 팥물을 끓여 새알을 넣어 팥죽을 만든다. 나도 엄마를 도와 새알을 동그랗게 빚었었다.

부엌에서 풍기던 은근한 팥냄새, 커다란 국자를 들고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큰 가마솥에 한솥 가득, 그 많은 양을 끓여 누가 먹나 싶었지만 대식구가 모여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팥죽을 호호 불며 동치미와 함께 먹다 보면 가마솥은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다.

그때를 생각하니 어머니가 그립고 더욱 보고 싶다.

어머니는 늘 부지런하셨다. 작은 체구에 대가족 살림을 도맡으시고 밭일까지 하시며,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그냥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정말 힘들지 않은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니 얼마나 고단하셨을까?

해마다 12월 동짓날이 가까워 오면 그 시절이 떠올라 팥죽을 만들어 본다. 그러나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그 팥죽 맛은 아니다.

오늘 공원에서 만난 팥죽 한 그릇.

그 따스한 김 속에서 나는 어머니를 다시 그려본다.

지금은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오늘따라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듯 가깝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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