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치명적인 적은 내부에 있다.
"R팀장, 돌아버리겠다. C사장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공장을 새로 세우는 프로젝트도 성공적으로 끝나고, D사의 제품 생산도 글 서두의 그 사건을 제외하고는 순조롭게 운영되어 모처럼 여유로운 생활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직장을 이직하게 되어 새로운 업계의 지식과 기술을 배워야 했기에 늘 남의 이야기를 듣는 습관에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 외에는 저의 의견을 표현하기보다는 늘 상대방의 말에 공감하고 동조하는 제스처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이나 타인과 엉킨 일, 고민 등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F이사도 말이 많은 사람이라 예외가 아니었고, 저를 P상무와 대립하는 C사장의 라인이라 여겼는지 또다시 P상무와 관련된 험담을 저에게 늘어놓기 시작한 것입니다.
" 아 글쎄, R팀장에게도 말했다시피, P상무 스타일로는 H사 비즈니스를 따기 힘들잖아?
그래서 C사장에게 P상무는 안된다. H사 비즈니스는 이렇게 해야 한다 뭐 이런 것들을 알다시피 C사장에게 계속 보고했잖아?
아 근데 글쎄 C사장은 그 메일을 John(아시아 총괄사장이며, C사장의 보스)에게 그대로 forward(전달) 하는 거야"
"예? 그것을 그대로 forward 했다고요?"
"아 글쎄 그러더라니까?"
"근데 박사님은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저는 저보다 한 살이나 많고, 자동차 촉매 쪽으로 박사학위까지 있었던 F이사를 '박사님'이라고 부르며 꼬박 존댓말을 썼습니다.
"글쎄 그것도 미치겠다... 아니 지가 forward 한 그 메일을 나에게 그대로 forward 해 주는 거야. 그건 또 무슨 뜻이야?"
그러자 C사장이 한국에 온 지 벌써 5년이 다되어 가고 있었고, 지사장의 통상 임기가 5년이라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C사장에게 있어서 P상무가 자신의 후임자로 비치는 것이 탐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 아예 P상무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으면 되잖아요?'
저는 이 말이 목구멍 밖으로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왜냐하면 F이사는 자신이 P상무에 대하여 C사장에게 직언하는 것이 H사 비즈니스를 따기 위해서 곧 회사를 위해서라고 험담 뒤에 늘 덧붙이곤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의 기간이 지났습니다.
갑자기 C사장은 저를 불렀습니다.
"이제 회사도 초기 세팅상태도 지나고 어느 정도 성장하였으니, 이제 팀장들 위로 부서장(임원급)을 세우려고 한다.
난 네가 공장을 총괄하는 공장장을 맡아 주었으면 한다."
저는 순간적으로 저와 거의 동갑이었던 제 또래의 팀장들(품질팀장, 구매팀장, 보전팀장)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한 번은 사양하는 말을 던지는 게 습관화된 한국인의 화법으로 겸손을 떨었습니다.
"저는 아직 여러 팀장들을 manage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C사장은 대수롭지 않은 듯 제 말을 넘기고는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본론을 꺼내 들었습니다.
"너에게 하는 말인데, 이제 P상무를 내쳐야겠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에게는 H사의 비즈니스가 필수적인데, P상무는 역량이 안돼.
그걸 따내기 위해서는 F가 전문가니 F가 대신하여 영업을 총괄하는 것으로 해야겠다."
"그럼 테스트센터의 장은 누가 하게 됩니까?
" 응 F가 겸직할 것이야."
사실 외국계회사에서는 조직의 업무가 분리되어 있고, 사람의 역할과 책임 (Role and Responsibility) 또한 명확합니다.
그런 외국계 C사장의 입에서 겸직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저는 너무 뜻밖의 조직체계라 이게 뭔가 했습니다.
'이게 또 F이사의 아이디어구나! 참 대단하다. 어떻게 C사장을 구워삶았기에?'
"C사장님, F이사의 영업 쪽 능력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P상무를 내보내는 것은 좀 그렇습니다.
만약 F이사가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땐 대안이 없게 되잖아요?"
그러나 이미 마음을 굳힌 C사장은 저의 말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야. 이번에 새로 입사한 F 어때? 박사인데도 사람이 참 겸손(humble)하데?"
이것이 F에 대한 C사장의 첫인상이었습니다.
저 역시 때로는 박사답지 않게(?) 천박한 농담을 던지는 F이사와 격의 없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글 머리에 있는 그 사건에서 F이사의 실체를 깨닫게 된 이후로 겉으로야 내색을 하진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 사람과는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쟁사에서 F이사와 오랫동안 함께 근무했던 최근에 합류한 보전팀장으로부터 F이사는 정치만 잘하지 실제로 성과를 낸 적은 없다는 말을 들었기에, 저는 이때 C사장의 이러한 결정에 위기감을 느끼게 되어 제 나름대로는 둘러서 F를 검증한 후에 P에 대하여 결정해도 늦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놓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약 한 달이 지난 후 회사 내부에 조직 발령이 났습니다.
예상대로 F이사가 영업총괄 상무로 진급한다는 소식이었는데, 그 밑에는 전혀 예상 밖의 인사발령이 붙어있었습니다.
P상무를 공장장으로 발령을 낸 것입니다.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저는 C사장과 대화를 하게 되었을 때, 왜 나를 공장장으로 진급시키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C사장은 저의 질문에 대비하였다는 듯이 '네가 사양하지 않았냐'라고 태연하게 답했습니다.
저는 상사가 승진시켜 주겠다고 하면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교훈을 하나 얻었습니다.
(하지만 이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 않는 듯합니다. 저는 네 번째 직장에서 똑같은 실수를 벌이고 마니까요)
그리고 뭐 승진한다고 월급이 오르는 것도 아닌데 하는 마음으로 나름 이 인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이라 저는 친하게 지내던 인사팀장에게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인사팀장은 그동안 입이 근질거렸는지 그 내막을 자세히 말해주었습니다.
C사장은 마침내 아시아 보스인 John의 승인을 얻어 P상무에게 해고를 통보하였습니다.
그러자 P상무는 말 그대로 길길이 날 뛰었습니다.
P상무는 평상시에도 한국 법인이 설립된 것은 순전히 자신의 공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자신이 없었으면 오늘의 여러분들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을 우리에게 하곤 했습니다.
초기에 두 general manager가 껄끄러운 동거를 하게 되었고 결국 C사장의 밑으로 들어가기로 했을 때에도 몇 년만 참으면 차기의 한국사장 자리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번의 결정은 그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 '본사에 이의를 제기하겠다'라고 하면서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C사장은 한발 물러날 수밖에 없었지만 이미 영업 총괄은 F에게 주기로 공표하였기 때문에 이를 무를 수도 없었습니다.
마침 공장장 자리가 비어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쳐 순간적으로 P상무에게 공장장 자리를 맡으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사장이 되려면 공장 사정을 잘 알아야 하니 이 기회에 공장을 제대로 배워보라는 조언까지 곁들여서 말입니다.
저는 공장장 자리를 사양한 것이 오히려 P상무를 쫓아내지 않아도 된 결과가 된 것을 보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훈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에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사발령 사태가 결국 어벤저스들이 아무리 어셈블해도 이길 수 없었던 우주 최강의 적을 지구로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바로 '그'가 무대의 정면에 본색을 드러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