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의 귀환 그 이후, 큰아들의 직장 후반전(5)

호우시절(3)

by 리본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영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장 1절~3절)

"R 본부장님, 이번에도 실패했다면서요?"

우리 회사의 마당발이었던 구매 G팀장은 저와 나이 차이도 얼마 되지 않았고, 비교적 여기에 합류한 최신 멤버이기도 하였지만, 아무래도 제조와 엉키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제조본부장이었던 저와 막역하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요즘 Y팀장의 얼굴이 말이 아니던데..."

그러자 회사에서 가장 유능한 자원이라고 인정을 받고 있었던 Y팀장을 은근히 견제하고 있었던 G팀장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습니다.

"글쎄 참 이유를 모르겠네요? Y팀장은 평소에 자신들이 개발한 신제품은 다를 거라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고 다녔는데..."


제조본부는 기존 제품의 개선에 집중하는 한편, M소장의 지휘하에 Y팀장을 비롯한 새로운 자원들 (입사한 지 3~4년 정도 이내인 사람들)은 글로벌기업들은 이미 성공하여 출시한 새로운 타입의 효소를 사용하는 제품을 개발하고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존 제품이 가지고 있는 공정의 불안정성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우리 회사의 초기 멤버들이 구축한 공정과는 다른 방법으로 제품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공정조건을 기존의 제조라인에서 테스트하여 검증하고자 생산 라인을 빌려야 하는데, 저는 제조본부장이 되고 나서 되도록이면 연구소의 요청을 들어주어 라인을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입사 초기부터 이 제품의 기술적인 부분을 배워야 했기 때문에, 이 분야의 기술에 있어서 가장 해박해 보이는 Y팀장과 그의 오른팔인 Z차장을 스승으로 모시며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기존 제품을 개선하면서 기존제품이 선진제품과 비교하여 가지고 있는 성능상 한계들이 어느 정도 보였기 때문에, 그만큼 신제품에 대하여 거는 기대가 컸기 때문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제가 제조본부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내 연구소에서는 신제품 개발이 완료되었으니 이제 양산이관계획에 따라 양산라인에서 제대로 Validation 하고 싶다는 업무 연락서를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이 제품은 우리 회사가 선진국형 사업체로 가는 기로에 갈 수 있는 중요한 제품이었기에 회장님을 비롯한 경영진들에게 큰 관심과 기대를 받고 있는 제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신제품이 양산 validation 과정에서 보기 좋게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고 3개월 동안 여러 번 시도하였지만 계속하여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심각한 문제는 들리는 얘기로는 연구소에서는 그 원인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이 신제품들이 3개월가량 양산에 계속 성공하지 못하자, Y팀장은 초조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연구소에서 개발할 때와 pilot (연구소와 제조의 중간 scale의 제조설비) 테스트에서는 원하는 성능이 나왔는데 양산단계에서 scale이 커지니까 균일한 성능이 나오지 못하고 한 lot 내에서 제품의 성능 값이 들쑥날쑥해진 것입니다.


저는 이 문제의 원인으로 개발단계와 양산단계에서의 미묘한 공정조건의 차이가 scale up을 하는 과정에서 증폭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연구소에만 박혀있던 연구원들의 머릿속에는 test 단계에서의 조건들과 양산과정에서의 조건들을 세팅된 숫자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scale up 하는 과정들에서 증폭되는 변수들에 대한 경험이 부족하여 이 변수들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데 있습니다.

말 그대로 집에서 음식을 만드는 것과 학교에서 대량 급식을 하는 것에서 맛의 차이가 발생하는데 같은 레시피에 같은 온도에서 음식을 만드는 데 왜 맛이 다를까라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한 맥락입니다.


저는 세 번째 공장에서 공장을 짓고, 라인을 세팅하고 영국본사의 연구소에서 개발한 많은 신제품을 양산이관하면서 소위 scale up 하는데 발생하는 많은 trial error들을 다루어 봤기 때문에, 이 문제도 한번 들여다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직에서는 다른 여타의 한국회사들과 마찬가지로 공장에서 발생하는 모든 품질과 관련된 기술적 문제들의 해결 책임은 연구소에게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제품은 연구소에서 기존 공정과는 다른 자체적으로 새로운 concept으로 제조하는 것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에 제조본부에서 관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제조본부장으로서 근무하고 있는 저는 여기 입사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기술적인 부문에서는 초짜이기 때문에 이 양산이관에서의 실패에 관여를 하는 것은 정말 주제넘은 일이었습니다.

(이때는 앞에서 서술한 기술적인 개선의 가시적인 결과가 아직 열매를 맺지 않고 진행 중이었기 때문에 외부에 공유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 제품이 계속해서 양산은 실패하고, 그것에 대하여 경영진들이 가지고 있던 실망감을 바라보게 되자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선진국형 제품이 개발되어야 제가 몸담고 있는 회사의 미래가 담보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어렵게 보내주신 회사인데, 설마 또 이렇게 흐지부지 비틀거리다가 쓰러지는 운명을 가지고 있는 회사라고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단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들여다 보기만 하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파일서버에 공유되어 있는 연구소의 모든 연구 기록파일들을 시간을 가지고 리뷰해 보았습니다.

저는 개발단계와 양산단계에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focus를 맞추고 모든 자료들을 찬찬히 들여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Y팀장, 내가 연구노트와 양산이관 문서들을 보니까 연구단계에서 사용한 잉크와 양산 단계에서 사용한 잉크가 다르던데? 혹시 양산에서 성능이 나오지 않은 이유는 이 잉크 차이가 아닐까?"

저희 공정에서는 필름에 전기 전도성 잉크를 스크린 인쇄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제품의 개발단계에서 사용한 잉크와 양산단계에서 사용한 잉크가 달랐습니다.

"R본부장님, 우리 제품은 잉크의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전 잉크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Y팀장은 저의 의견을 일언지하에 묵살하였습니다.

막상 담당 팀장이 그리고 회사에서 가장 인정받는 전문가가 이렇게 단정해 버리니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흐지부지되었냐고요?

제가 누굽니까?

'격물치지'라는 거창한 말은 뒤로하고라도 문제에 대하여 집요하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제가 중요시하는 또 하나의 단어가 있지요?

'우문현답' 우리들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현장에 있다.

저는 잉크를 헌장에서 직접 인쇄하는 인쇄전문가를 찾아갔습니다.


"W차장, W차장이 연구소 신제품의 개발단계에서 사용한 잉크와 현재 양산이관단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잉크의 물성이 같아요?"

"아닙니다. 많이 다릅니다."

"어떻게 달라요?"

"예 개발단계에서 사용한 잉크는 아주 끈적하고 점도가 셉니다. 하지만 양산단계에서 사용하는 잉크는 비교적 흐름이 부드럽고 점도가 약하여 잘 흐르고 얇게 코팅이 됩니다."

"그래요? 그럼 왜 개발단계에서 사용한 잉크를 양산이관단계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나요?"

"예 왜냐하면 개발단계에서 사용한 잉크는 너무 뻑뻑해서 양산 scale에서는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발단계에서는 소량 생산하니까 문제가 없지만, 양산으로 가게 되면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어 그동안 잉크가 너무 뻑뻑해져서 아예 인쇄하기가 너무 힘들어져요."

"그런데 그 개발단계 잉크도 현재 기존 양산 제품의 일부 품목에 사용되고 있는 양산용 잉크로 알고 있는데..."

"그야 그 제품에는 잉크를 특정 반응 부위, 아주 작은 영역에만 사용하니까 괜찮죠. 하지만 본부장님도 아시다시피 신제품에는 아예 이 잉크로 도배를 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그렇게 되면 필름 한 장에 인쇄되는 잉크량이 수십 배 더 많아집니다.

그러면 필름 열 장 정도만 인쇄해도 기존제품 한 lot에 사용되는 잉크양보다 많아집니다. 그러니 양산하는 동안 잉크가 굳어져 인쇄상태가 양산 scale에서는 균일하게 되지 않아 이 잉크로 한 LOT를 생산하기에 무리입니다. 그래서 R본부장님이 제조본부장님이 되시기 전 L이사님이 이 잉크는 양산에서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제조본부장으로서 L이사의 결정이 합리적이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양산과정에서 인쇄 편차가 생기면 lot 내 원단의 편차가 생기고 그렇게 되면 제품도 균일하지 않게 되는 게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문제는 L이사는 강 건너 불 보듯이 그저 '노'라고만 하였다는 것이죠.

저는 한 발짝 더 나갔습니다.

"그래, 그럼 그 잉크처럼 점도가 세어 뻑뻑하면서 양산성도 좋은 잉크가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얼마 전 R본부장님이 양산에 적용하기로 결정하신 잉크 있잖아요? 그 일본산 잉크..."

"어, 내가 최근에 기존 제품 잉크를 다 그것으로 바꾸기로 결정하였지..."

"예 그 일본산 잉크가 제가 경험한 바로는 개발단계에서 사용한 잉크와 물성이 비슷합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R본부장님, 본부장님이 한번 만나봤으면 하는 사람이 있는데요?"

서너 개월 전 제가 본부장을 맡은 직후 구매 G팀장이 어느 날 저에게 한 사람을 소개해 줬습니다.

"이분은 일본의 잉크회사 한국판매상인데, 일본에서는 우리 업계에 사용되는 잉크로 꽤 알려진 회사인데, 한국에서는 매출이 없어서 이번 기회에 한번 한국시장도 뚫어보려고 해서요."

우리 사업에서는 이런 판매상들을 통해 동종업계의 동향도 파악하기 때문에 제가 굳이 만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저희 회사는 큰 규모의 미국회사들과는 달리 고객 맞춤형 잉크 개발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저희와 안면을 트시면 본부장님 회사에 맞는 잉크도 개발하여 pilot단위라도 만들어서 공급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일본회사의 고객 친화적 사업 비즈니스는 익히 경험한 바 있기 때문에 (저의 '사회초년생 일본에 가다' 편 참조) 저는 일단 환영의 의사를 비추었고, 적극적으로 테스트해 보겠다고 하였습니다.


"예, 일본잉크를 사용해서 만든 샘플을 분석해 봤는데, 성능 차이는 미약하게나마 좀 더 나아 보입니다만 그렇다고 유의미한 차이가 있지는 않습니다."

품질팀에서 일본 잉크를 사용하여 사용한 제품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습니다.

"예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우리 공정은 잉크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연구소에서도 잉크를 바꾸는 것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지 않아 '그럼 그렇지'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저는 잉크를 인쇄하여 원단을 납품하는 업체의 입고검사를 하는 분석원에게 그동안 입고된 제품의 데이터를 가져와 달라고 해서는 그 데이터들을 유심히 검토하였습니다.

"어 내가 보기에는 우리 제품 중 가장 까다로운 제품(탕자의 귀환 그 이후, 큰아들의 직장 후반전(4) 참조)의 원단 입고 검사 중 규격을 맞추기 못하여 fail 나는 경우가 간혹 있던데?"

"예 제가 듣기로는 이 제품에만 사용되는 잉크는 인쇄성이 좋지 않아 업체에서도 여간 불평해 마지않습니다."

"그래? 그러면 잉크를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닐까? "

"저희 하고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저희야 입고검사에서 문제가 생기면 폐기하고 반품시키면 되는걸요."

품질분석원의 의견은 그러했지만 그것은 평가하는 사람의 입장이고 엔지니어의 입장에서는 입고 검사 시 fail 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공정에서 그만큼 이 변수가 증폭될 잠재적인 위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더구나 그 fail 나는 원자재의 잉크는 앞서 언급한 미국산 뻑뻑한 잉크를 사용하는 경우에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고, 이 뻑뻑한 잉크를 사용하는 제품은 우리 제품 중 가장 까다롭다는 제품(앞서 언급한 건조온도에 문제가 있었던 그 제품)에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비록 건조 온도를 높여서 그 제품은 안정적으로 되었지만 그 제품의 숫자를 유심히 바라봤을 때 외부 기준으로는 합격이지만 여전히 불안정한 수치들이 보였습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러한 미묘한 차이들을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가는 것이 쌓여 결국 눈에 띄는 차이를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던 저는 이 특정 제품에 우선적으로 일본산 잉크로 적용하여 수치의 변화를 보고 싶었습니다.


"G팀장님, 이번 일본산 잉크를 사용하여 인쇄할 때 업체는 뭐라고 합디까?"

"아주 좋아합니다. 인쇄성이 좋아서 편하다고... 그래서 이 샘플이 제품의 품질에 최소한 영향이 없어서 사용되었으면 한다고..."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니, 이 일본산 잉크를 사용하면 원자재의 품질이 눈에 띄지 않는 수준이지만 좋아질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제품을 일본의 잉크로 바꾸기에는 하나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격이었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는 미국산잉크는 대량으로 양산해서 세계에 공급하기 때문에 가격이 저렴하였습니다.

거기에 비하여 수요처가 많지 않은 일본산 잉크가 규모의 경제 면에서 가격을 미국산만큼 낮추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본부장님, 가격은 어떻게든 제가 맞추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소량이지만 신제품은 이 재질의 잉크를 많이 사용하는 타입이라서... 만약에 신제품이 양산화에 성공되고 이 잉크를 사용할 경우, 물량은 한없이 커지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하여 미리 가격을 맞추어 달라고 설득해 보겠습니다."


마침내 일본산 잉크에 대하여 정책적으로 가격을 맞추어주겠다고 하였으니 저는 최근에 기존의 까다로운 제품뿐만 아니라 기존제품에 쓰고 있던 모든 잉크들을 일본산으로 다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원자재 수입검사부터 제품의 성능을 세심하게 확인한 결과 제품의 품질이 동등 이상으로 조금 더 나아진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자재의 수입 검사 fail이 사라졌기 때문에 업체에서도 비용면에서 절감하였다고 이 결정을 환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효과의 품질적 수치 차이는 보고하기에는 미미한 듯하여 외부에 보고하진 않고 당분간 나 혼자만 간직하기로 하였던 사안이었습니다.

현장의 소리는 하나님께서 회사의 사활이 걸린 이 신제품의 양산화의 성공의 열쇠를 저에게 미리 준비시키셨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자 그러나 이것은 저만의 신앙의 영역이고, 이러한 솔루션을 연구개발의 주역이지만 전혀 이 솔루션에 동의하지 못하는 동료들에게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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