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매각,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지고
" 제가 회사를 매각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여러분도 잘 아는 이 기업이 규모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크고 조직이 잘 갖추어져서 이 회사를 성장시키는 데 저보다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회장님의 신년사는 모회사와의 매각을 위한 MOU(양해각서)를 사인한 후 이 매각에 대하여 그 이유를 설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계셨습니다.
사실 회사를 창업하는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은 회사를 사유재산이라고 생각하고, 회사를 키우는데 평생을 걸며,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따라서 회사를 창업하고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며, 일정 규모로 키운 다음 회사를 큰 기업에 매각하여 큰돈을 버는 것을 목표로 하는 미국의 스타트업 사장들과는 회사에 대한 애정(때로는 집착)이 남다릅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성공적인 M&A의 경우가 드물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회사를 창업한 사람은 웬만해서는 자신의 분신과 같은 회사를 팔지 않기 때문에, 만약 어떠한 기업이 매각 물건으로 나왔다 한다면 오죽하면 내놓았겠느냐 하는 생각들이 지배하기 때문에 웬만한 회사에서는 그 기업을 인수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리고 매수를 할 만큼 탐나는 기업이 있다면, 수익성이 좋고 미래의 전망이 밝다는 말인데, 회사의 창업자이자 경영자로서 타이틀을 중요시하는 한국의 어떤 오너가 그 회사를 팔겠습니까?
그렇기에 회사를 창업하여 20여 년 성공신화를 써오신 회장님께서 갑작스럽게 회사를 매각한다고 선언하시자 우리 종업원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회사를 매각한다는 조짐은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그 많은 임원들이 요 몇 개월 사이에 대부분 정리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업본부장, 영업본부장, 품질본부장 등이 줄줄이 퇴사하거나 해고되어 본부장들이 거의 전멸하였습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펀드매니저 출신이었고, 사채시장에 발이 넓었던 사장님께서 이 회사의 매각의 마담뚜 노릇을 하셨는데, 이를 기화로 회장님을 보필하며 회사를 성장시켰던 회장님 라인들을 쳐 내리기 시작하셨고, 이것에 감정이 상하신 회장님도 사장님 라인들을 뚜렷한 실적이 없다는 것을 구실 삼아 보복하듯이 해고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회장님이 회사를 매각한다고 발표했을 때, 임원이라 해봤자 M연구소장, 그리고 L이사(신사업본부장) 둘 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저는 업무는 본부장이지만 직급은 아직 부장이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인지, 아니면 대놓고 정치(줄 서기)를 하지 않고 (사실 이때는 그런 라인이 있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실무(일)만 하고 있어서 누구 라인이라는 파벌싸움의 눈에 띄지 않아서 본부장임에도 타깃에서 비켜난 것인지 지금도 알 길은 없습니다.
"R본부장님, 본부장님이야 기술직이라 괜찮겠지만, 재무담당인 저나 인사담당인 C는 이번 매각협상이 끝나면 딴 길 찾아야 해요.
그 회사 모그룹에서는 당연히 돈관리는 믿을 만한 자기 사람을 보내어 맡게 할 거고 인사도 마찬가지죠. 큰 회사라 인사팀이 훨씬 강할 텐데..."
가뜩이나 친하였던 U부장과 C팀장은 요즘 들어 유달리 붙어 다니며 회사 구석에서 함께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습니다.
보통 양해각서(MOU)는 법적인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계약을 파기해도 페널티를 물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수자의 입장에서는 회사의 구석구석을 다 알아야 하고, 특히 기술적인 면에서 성장 잠재력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회사의 중요한 노하우나 기밀이 새어나갈 위험이 큽니다.
따라서 비밀유지계약을 기반으로 하는 MOU가 맺어지고, 이후 인수자는 재무와 기술, 품질 등 각 분야의 베테랑들이 인수단을 꾸며 피인수 회사의 핵심 인원(팀장이나 임원)들을 불러 전방위적인 조사를 합니다.
이번 인수조사단의 단장으로 온 사람은 이번 M&A를 위하여 계열사의 사장으로 진급되어 온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모부사장님, 모사장님, 모 대표님 등 조사단내에서도 타이틀이 혼용되어 불리고 있었습니다.
" R본부장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K사장은 나의 대학교 동창입니다. 이번 매각협상이 이루어진 것도 그 친구와 저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친구는 회장님을 설득하고 나는 우리 내부조직을 움직이고."
모부사장님은 자신의 실사단과 우리 회사의 팀장급 이상들이 상견례 겸 회식을 위하여 식당에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술을 못 마셔 늘 구석자리에 앉은 저의 앞자리에 굳이 앉으셨습니다.
" 이 양복은 고령의 노모께서 제가 사장으로 진급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직접 양장점에 주문하여 제작한 옷입니다. 저번 MOU 사인할 때 입었는데, 오늘 이 회사와 공식 상견례 겸 회식자리가 있다고 하여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입고 왔습니다."
저는 회식자리에서 처음 본 사람에게 사적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모부사장님을 보면서 역시 그릇이 다르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이 회사는 핵심인력이 세 명 있는데, R본부장님이 그중 최고의 인재라고...
그래서 R본부장은 반드시 안고 가야 한다고..."
"아닙니다. 저는 여기에 입사한 지 겨우 1년이 지났습니다. 제조를 맡고 있고... 이쪽 분야는 잘 모릅니다."
앞에서 노골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저는 민망해져서 겨우 답변을 가려서 하느라 진땀을 뺐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3주 이상 가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모부사장님 실사단은 회사에서 갑자기 종적을 감추어버렸습니다.
" R본부장님, 이번 매각은 결렬되었습니다. 회장님이 요구한 금액과 그들이 제시한 금액차가 너무 컸어요."
U이사는 내심 안심이 된다는 듯이 저에게 계약이 파기된 사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실사단에서 실사를 하면서 회사에 큰 risk가 두 가지 있는데 그것을 구실로 처음에 불렀던 가격을 대폭 깎아야 한다는 거예요. 당연히 회장님은 거부하셨고..."
"그럼 매각은 물 건너가는 건가요?"
" 아닐걸요. 이미 회장님 맘은 강을 건너버렸어요. 다른 인수자가 나타나겠죠."
"본부장님, H감사가 한번 보자네요. 오후에 부사장실에 가보세요."
" H감사가?"
저는 사실 외국계회사나 대기업 공장에만 다녀서 회사의 감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예 가시기 전에 저를 한번 보고 가시죠. 드려야 할 정보가 있어서..."
C팀장은 임원들을 제외한 우리 직원들만의 아지트인 옥상으로 저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H감사가 우리의 회사에 들어오게 된 경위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H는 공직 생활도 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공공의 국책사업에도 관여하였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이민 가서 주유소 사업 등을 하여 어느 정도 자수성공한 후 은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한참 바이오 열풍, 벤처열풍이 한국에 불 때에 우연히 저희 회사를 눈여겨보게 되었고, 저희 회사가 상장하고, 한참 주가가 오르고 있자 저희 회사에 소위 퇴직금을 몰빵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위의 지인들까지도 끌어들여 투자를 하도록 설득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벤처기업이 그러하듯이 상장 초기의 거품은 이내 사라지자 회사의 주식은 중소기업의 평균 수준으로 하락하였는데, 이때 손절매를 하지 못하고 계속 주식을 쥐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H는 개인적으로 막심한 손해를 보게 되었고, 주위로부터도 불만과 질타의 시선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주총회가 있을 때마다 소위 소액주주들을 대표하여 발언권을 행사하고, 경영진들을 비난하는 것으로 그 분풀이를 하곤 했습니다.
특히 회장님께서 하신 결정들 중 크게 손실을 본 부분들을 경영능력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하고, 개인적인 사익을 추구하는 비리가 있다느니 하면서 비난을 하고 다녔습니다.
결국 회장님은 이 H를 회사의 감사로 임명하는 것에 자의 반 타의 반 동의하게 되었고 H감사가 한 식구가 되게 함으로써 이 비방을 잠재우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오히려 더욱 H의 기를 높여주게 되었고, H는 회사에 틀어박혀 회장님을 비롯하여 경영진들의 의사결정에 시시콜콜 간섭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임원들에게 접근하여 자신의 사람들을 만들고 내부의 정보들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많은 임원들이 다 나가고 나니 비로소 제조본부장을 맡고 있는 제가 자신의 안테나에 걸렸나 봅니다.
"친절하게 대응하시되. 기밀사항은 언급하지 마세요."
C팀장은 H감사의 방에 들어가는 저에게 조언해 주었습니다.
H는 역시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자신의 과거사를 거리낌 없이 털어놓았습니다.
"그러게 말이야. 아니 자신에게 맡겼으면 좋은 가격에 팔 수 있었을 텐데"
H감사는 주가를 띄울 자신이 없으면 경영에서 손 떼라는 말을 자신은 스스럼없이 회장님께 건의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인수자로 데려오는 회사는 회장님의 요구 금액을 맞춰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번에 오시는 분은 자수성가하신 분으로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경영 능력이 탁월하신 분이에요.
그리고 이번에 인수하시면 R본부장을 중용하시라고 추천해 줄게요. 그러니 R본부장이 책임지고 직원들을 잘 이끌어서 실사단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세요"
오죽하면 처음 본 부장급 본부장에게 이런 말을 하나 싶었지만 지금 주위를 둘러보니 회사에는 직원들을 이끌 수 있는 임원이 거의 부재한 상황이었습니다.
"H감사가 설치는 이유는 매각을 중개해 주면 매각 대금의 몇 프로를 수수료로 받거든요."
C팀장은 방을 나오는 저를 잽싸게 낚아채고는 H감사가 왜 저렇게 적극적인지 궁금해하는 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앞서의 실사단과의 회식이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는 두 번째 상견례와 회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매각에는 회장님 사장님은 두문불출 자리에 나타나지 않아 그분들의 불편한 심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제대로 된 양해각서 없이 회사의 기밀을 누출해도 될까?
회장님이 없는 이 계약이 성사될 수 있는가?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실사단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는데 갑자기 실사팀들이 실사를 멈추고 술렁거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곤 실사를 중지하고 짐을 싸더니 모두 황망히 회의실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저희는 회장님께서 O가 대표이사로 있는 주식회사 O와 회사의 대주주 지분을 양도하기로 계약했다는 공시를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종업원들에게 하루아침에 새로운 주인이 생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