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의 감옥에서 존재의 해방으로
오랫동안 축구를 하며 여러 팀들을 거쳐갔지만, 그중에서 만난 한 팀에서의 경험은 내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방향성 없이 그저 즐겁게 공을 차는 시절을 뒤로하고, 좋은 선배들을 만나 전술이라는 정교한 체계 속에서 사고하고 플레이하는 법을 배운 시간은 전혀 다른 차원의 성장을 가져다주었다. 전술적 움직임 하나하나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그 체계 안에서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며 필드를 누비는 과정은 신체적 성장을 넘어선 정신적인 고양감을 주었다.
그 과정에서 무엇보다 나를 벅차게 했던 것은 '나'라는 개인이 사라지고 '우리'라는 하나의 팀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나와 비슷한 열정을 가진 후배들이 더 들어오고, 우리가 하나의 팀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을 느낄 때의 그 기쁨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는 결국 작은 축구 대회에서 우승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지만,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었다. 그저 함께 땀 흘리고 전술을 수행하며 축구 그 자체에 몰입하는 하루하루가 너무나 즐거웠을 뿐인데, 우승은 마치 선물처럼 뒤따라왔다.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우승이라는 '결과'를 소유하기 위해 달렸다면, 오히려 그 긴장과 불안 때문에 그런 큰 기쁨을 누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그 팀을 떠나야 했던 순간의 슬픔이 그토록 깊었던 것은, 내가 그곳에서 단순히 트로피를 얻은 것이 아니라 동료들과 함께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책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를 읽으며, 나는 그날의 환희에 비로소 이름을 붙여줄 수 있었다. 그것은 완벽한 '존재 양식'의 시간들이었다.
책소개
서양 현재 철학의 권위자인 박찬국 교수가 쓴 이 책은 에리히 프롬의 원전 [소유냐 존재냐? (To Have or to Be?)]가 지닌 심오한 통찰을 현대인의 눈높이에서 체계적으로 풀어낸 길잡이이다. 원전 [소유냐 존재냐?]는 현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근본적인 실존 양식을 날카롭게 분석한 사회심리학의 고전이다. 프롬은 무한한 축적과 소비를 통해 행복을 찾으려는 '소유 양식(Having Mode)'이 필연적으로 불안과 소외를 낳는다고 비판하며, 대신 자신의 잠재력을 능동적으로 발휘하고 타인과 깊이 교감하는 '존재 양식(Being Mode)'의로의 전환을 제안한다. 물질적 풍요가 곧 인간의 완성이라는 착각을 깨뜨리고,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한 실천적 해답을 제시하는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소외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진정한 자아를 찾는 길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현대 자본주의의 함정: 소비하는 인간과 소유의 불안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속삭인다. "당신이 가진 것이 곧 당신이다 (I am what I have)."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할 때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으며, 돈 자체를 삶의 유일한 목표로 설정하곤 한다. 심지어 그 목표를 위해서라면 과정에서의 부조리조차 타당성을 얻는 듯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프롬은 이러한 '소유 양식'의 삶은 필연적으로 불안과 폭력을 동반한다고 경고한다. 내가 소유한 것들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외부의 것이기에, 그것을 잃는 순간 나의 존재 가치도 함께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소유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채워나가려고 할수록 소유물의 질과 양에 집착하게 되고 그것들을 획득하기 위해 힘을 필요로 하게 된다. 결국 나의 소유를 지키기 위해 혹은 가지기 위해 폭력으로 이어지게 된다.
반면, 프롬이 제안하는 '존재 양식'은 능동적인 에너지를 기반으로 한다. 하나의 주체로서 느낄 수 있었듯 무엇인가를 직접 생산하고 나누는 행위는 소비와 달리 그리 간단하지 않다. 몸을 더 많이 움직여야 하고,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지적인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생산의 '과정' 속에서 존재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존재이며, 그 유한함 앞에서 무력감과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무엇인가 완전히 몰두하여 생산적인 에너지를 발산하는 순간, 우리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 자신을 잊을 정도로 그 일에 취해 있을 때, 시간의 흐름은 멈추고 죽음의 그림자는 저 멀리 물러난다. 생산의 즐거움은 완성된 생산물을 바라볼 때보다, 그 생산 과정에서 내가 온전히 주체가 되어 에너지를 쏟아붓는 그 '찰나'에 있다. 이러한 몰입은 우리를 시간의 노예가 아닌 주인으로 만들며, 죽음마저 잊게 할 만큼 강력한 생동감을 선사한다.
샤를 보들레르의 '취하라'와 존재의 완성
이러한 존재의 찬란함은 시인 샤를 보들레이의 [취하라] 와도 맞닿아 있다. 보들레르는 시간의 짐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취해야 한다고 노래했다. 여기서 '취함'이란 단순히 정신을 놓는 것이 아니라, 축구장에서의 몰입이나 연구자가 진리를 탐구하며 느끼는 희열처럼 삶의 에너지를 능동적으로 불태우는 상태를 의미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무엇이든 좋으니 당신을 열광하게 하는 것에 취하라는 그 외침은, 프롬이 말한 존재 양식의 능동성과 완벽히 일치한다. 취해 있는 자에게 시간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며, 죽음은 삶의 생동감을 방해하지 못한다.
-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항상 취해 있어야 한다.
모든 게 거기에 있다.
그것이 유일한 문제다.
당신의 어깨를 무너지게 하여
당신을 땅 쪽으로 꼬부라지게 하는
가증스러운 시간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서
당신은 쉴 새 없이 취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에 취한다?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당신 마음대로다
그러나 어쨌든 취하라
그리고 때때로 궁궐의 계단 위에서
도랑가의 초록색 풀 위에서
혹은 당신 방의 음울한 고독 가운데서
당신이 깨어나게 되고
취기가 감소되거나 사라져 버리거든
물어보아라
바람이든 물결이든 별이든 새든 시계든
지나가는 모든 것
슬퍼하는 모든 것
달려가는 모든 것
노래하는 모든 것
말하는 모든 것에게 지금 몇 시인가를
그러면 바람도 별도 새도 시계도
당신에게 대답할 것이다.
이제 취할 시간이다.
마무리: 목표는 소유인가, 나침반인가?
이 과정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생산을 위해 세우는 '목표'나 '꿈' 또한 결국 무언가를 손에 넣으려는 소유의 개념이 아닐까? 하지만 질문의 대답은 명확하다. 존재 양식에서의 목표는 '전리품'이 아니라 에너지가 흩어지지 않게 잡아주는 '나침반'이자 '닻'일 것이다.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을 때 "내 인생은 실패했다"라고 느끼는 것이 소유의 삶이라면, "우승은 못 했지만 그 과정에서 충분히 성장했다"라고 느끼는 것이 존재의 삶이다. 꿈을 소유하기 위해 과정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이라는 방향을 향해 항해하는 과정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목표와 존재가 조화를 이루는 지점일 것이다.
얼마전 오랜만에 그 축구팀 멤버들과 함께 할 시간이 있었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나 정말로 오랜만에 만났지만 우리는 어제도 만난 것처럼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건 아마 우리가 그만큼 그곳에서 뜨겁게 그리고 함께 존재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결국 인생은 무엇을 남기느냐의 기록이 아니라, 매 순간 무엇에 취해 얼마나 생생하게 살았느냐의 기억이다. 소유의 트로피는 서랍 속에 갇히지만, 존재의 경험은 나의 영혼 속에서 영원히 흐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