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편 꿈 꾸는 아내의 친구
소녀는...
힌 도화지 위에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큰 눈망울과 너풀너풀 흔들리는 듯한 머리카락.. 섬세하고 가느다란 손가락..
힌 도화지 위로 소녀의 부드러운 손이 움직이면 선들이 하나... 둘... 셋... 연결이 되며 모양을 만들고 이리저리 살아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소녀의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점점 날은 어둠이 짙어지며 온 세상은 침묵 속에 빠져들고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소녀 손에 지워진 연필이 힌 도화진 위를 스치는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소녀는 두 손을 맞잡아 깍지를 낀 채 목 뒤로 젖히며 휴....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며 주위를 살펴봅니다.
어둑어둑하던 창가는 어느새 옅은 여명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오늘도 밤을 꼬박 지새웠습니다.
작업 중에는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 물도 마시지를 않습니다.
소녀는 깍지를 낀 두 손을 풀어서 책상 위에 얹고 고개를 푹 숙이며 휴—하고 또 한 번 긴 숨을 내쉽니다.
그리고 촉촉해진 눈으로 조금 전 마지막 음영을 짙게 그려주었던 도화지 속 여자 주인공 얼굴을 쳐다봅니다.
이번이 두 번째 작품인데 여자 주인공이 안타깝게 죽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해피엔딩을 준비했었는데...
작품을 진행하면서 내 마음이 그대로 전이가 되었는지 처음 의도와는 다르게 슬픈 내용으로 전개가 되었고 결국 주인공 여자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집니다.
소녀의 창조물인 여자 주인공의 주검 때문인지... 아니면 현재 또는 앞으로 자기 자신이 처하게 될 현실 때문인지 모르는 눈물입니다.
소녀는 창조자가 꿈입니다.
하얀 도화지 위에 자신의 창조물을 만들어가는 만화가.. 만화가가 되는 것이 소녀의 꿈입니다.
소녀는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살아가야 될 현실이 어떤 건지를....
소녀는 자라면서 현실의 부정함, 그릇됨으로 인하여 소녀의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힌 도화지가 마구 더럽혀지고 있음에 진저리를 칩니다.
소녀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작품 속 여자 주인공의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처음 작품을 구상했을 때는 분명 행복한 여자의 삶이었는데 작품 속으로 소녀의 삶이 그대로 투영이 되며 슬프고 안타까운 주검을 맞이하게 된 여자 주인공..
소녀는 생각을 합니다.
소녀는 처음에는 행복한 삶, 소녀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삶이었는데....
소녀가 항거할 수 없는 외적인 어떠한 힘에 의해 소녀의 마지막 작품 속 여인처럼 불우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소녀는 또 다른 끔을 보았습니다.
소녀가 꿈과 현실 속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을 때 이던가... 아니면 두 번째 작품의 막바지를 그리고 있었을 때였던가...
소녀가 밤을 지새우며 작업을 하고 고개를 들었는데 조금 열려 있었던 창문 틈새로 햇살이 밀려들어 오고 있었습니다,
조금 열어둔 창문 틈새로 비추어지는 햇살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부셨는데 청아한 느낌에 이끌려 창문을 조금 더 열었습니다.
창문을 조금조금 여는 순간 너무나 환하고 투명한 햇살이 쏴-하며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소녀의 온몸을 감싸 앉으며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소녀는 밝고 청아한 햇살이 온몸을 감싸 안으며 따스한 온기를 전해주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두 팔을 벌려서 허수아비처럼 한참 동안을 눈을 감은채 해를 바라 보았습니다.
한참 동안을 허수아비 마냥 서 있다가 온몸이 따스한 햇살로 온기를 되찾을 때쯤 소녀는 감고 있던 눈을 살며시 떴습니다.
그때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서 걸어오는 수녀님 한분..... 해를 등지며 소녀가 쳐다보고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수녀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일순간 검은색 수도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서 또박또박 걷어 오던 수녀님과 맑고 투명한 아침 햇살이 어울려지며 환상인 듯 수녀님 주위가 아주 옅은 보랏빛과 분홍빛이 잔잔하게 감싸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소녀는....
너무나 따스하게 감싸 주고 있었던 햇살...
그리고 정갈한 검은색 수도복을 입으신 수녀님의 모습...
소녀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와 와락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엉엉 울면서 소녀는 수녀님을 따라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수녀님.. 수녀님...
꿈을 가질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마음속 깊이 드리워진 어둠을 감히 걷어낼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소녀는 맑은 햇살 속에 드리워진 검은색 수도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수녀님 모습이 마치 힌 도화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녀는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밤을 지새운 육체의 노곤함으로 깊은 잠에 빠져들며 꿈을 꿉니다.
힌 도화지.. 그리고 정갈한 모습의 수녀님... 나는 수녀가 되고 싶다...
소녀는 현실에서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치료해 주는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인가 피폐해졌던 마음이 조금씩 치유가 되는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습니다.
현실은 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게 하였고 아이들을 낳게 하였습니다.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소녀는 꿈이 없어졌는데... 꿈을 잃어버렸는데...
소녀를 이 세상 속에 살도록 만들어준 가족들과의 질긴 인연으로 인한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시간과 소녀가 결정하여 얻은 두 번째 가족과 정신없이 살아가야 하는 현실로 하루.. 이틀.. 일 년.. 이년.. 살다 보니 50이 넘은 소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50이 넘은 소녀는 무심히 거울을 보다가 화들짝 놀라며 화장솜을 찾아서 크린싱로션을 둠뚝 묵혀서 이마며 눈이며 코, 입, 목까지 힘 있게 문질렀습니다.
화장솜에는 아침에 정성스럽게 발라놓은 파운데이션이 묻어나고 연한 분홍색의 립스틱이 닦여져서 묻어 나옵니다.
50이 넘은 소녀는 화장을 지운 얼굴을 들어 다시 거울을 쳐다봅니다.
50이 넘은 소녀 얼굴에 보송보송 솜털이 돗은 꿈을 꾸는 소녀 얼굴이 클로즈업이 됩니다.
꿈을 꾸고 있는 소녀 얼굴... 눈망울에 행복이 가득 차고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꿈을 가지고 있는 소녀 얼굴... 소녀였던 얼굴이 보입니다.
소녀의 꿈...힌 도화지... 행복한 창조물.... 나의 수녀님....
어느 날처럼 앞만 보고 부지런히 걷던 50이 넘은 소녀가 갑자기 걸음을 멈춥니다.
앞에 무엇이 있지.... 무엇이 있길래 이렇게 부지런하게 걷고 있는 거지..
소녀는 50이 넘을 때까지 정말 부지런하게 걸어왔는데 어디를 가기 위해서 걷고 있는 거일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봅니다.
그러다 문득 50이 넘은 소녀는 뒤로 돌아서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바라다봅니다.
뒤돌아서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내가 걸어온 길.. 그리고 그 위에 점점이 찍혀있는 소녀의 발자국들..
뒤를 돌아서 바라본 자신의 발자국을 본 50이 넘은 소녀는 깜짝 놀랍니다.
자신은 아주 똑바르게 빠른 길을 잘 선택해서 걸어온 것 같았는데 뒤를 돌아본 길 위의 발자국은 왜 그렇게 삐뚤빼뚤하게 찍혀있고, 이리저리 해메인 듯하게 어지럽게 찍혀 있는 것인가.
50이 넘은 소녀는 망연자실하여 넋 놓고 한참을 바라다봅니다.
왜 이런 건가?
왜 이렇게 갈팡질팡 어지럽게 발자국이 찍혀있는 건가? 하며 의문을 가집니다.
그리고 다음 생각.. 그렇지.... 나는 갈 곳이 정해지지 않았었지..
가야 할 곳이 없었던 나의 길, 목표가 없었던 나의 길, 목표를 잃어버렸던 나의 길...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헤매게 된 나의 발자국들...
진정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이며, 내 삶의 끝자락은 어느 곳인가...
50이 넘은 소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려 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