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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와 잘 살기...

제29편 여자의 일생...... 아내의 엄마, 나의 장모님...

by 이and왕

철문을 열고 나오니 훅 하고 찬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올해도 어느덧 12월이 되었다.

50이 넘으니 세월이 힘껏 당겨진 활시위를 떠난 화살만큼 빨리 가는 것 같다.

고개를 숙이고 아랫배로 찬바람이 생-하며 들어오는 허리춤을 다시 한번 여미고 긴 한숨을 쉬어본다.

어제는 짓궂은 날씨 탓에 시장에 오는 사람이 적어서 남아있는 시금치나 열무를 파느라 저녁 늦게까지 시장에서 머물렀다.

그래서인가 허리가 아프고 목이 칼칼하며 잔 기침이 나온다.

몸이 오늘 하루는 쉬는 것이 어떤가 하며 속삭이는 것 같다.

오늘 하루 정말 쉬고 싶다.

몸은 말을 하는데 오늘 일수는 어떻게 내야 하나. 좀 있으면 애들 학비 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발을 이끌며 전봇대 옆에 메여있는 리어카로 향하게 만든다.

야물딱지게 묶어놓은 끈을 풀고 리어카를 내리는데 찬바람이 휭하고 불어온다.

바람팃인지 속마음 탓인지 눈물이 핑 돈다.

"이런 몹쓸...." 누구한테 인지 모르는 욕지거리가 나오며 리어카 손잡이를 소리 나게 잡았다.

리어카를 끌며 몇 걸음을 옮기다 뒤를 힐끗 쳐다보니 어스름하게 내 집 3층 집이 보인다.

3년 전 있는 돈 없는 돈 모두 끌어모아서 지은 집이다.

물론 1층과 2층은 새를 주고 우리는 3층만 쓰지만 정말 내 모든 인생을 모아 모아 만든 내 집이다.

2남 6여 참 많은 아이들을 내 배속으로 나았다.

남의 집 셋방살이하며 갖은 구박을 받았는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설음이 복받쳐 오른다.

내 한 몸이야 괜찮지만 돈 없는 부모 만나서 집주인 눈치를 봐야 했었던 자식들을 생각하면 한없이 슬퍼진다.

"이젠 되얐어..이젠.. 우리 애들 마음 편히 지낼 집이 있으니 이젠 되얐어.. "하며 혼잣말을 되새기며 뒤돌아 보니 정말 이쁜 우리 집이다. 보면 볼수록 대견하기 그지없다.

마지막 한 번 더 뒤돌아서서 자식들이 곤히 자고 있을 내 집을 보고 나니 어느덧 몸이 거뜬해온다.

큰 찻길 다다르기 전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자꾸 리어카가 뒤로 밀린다.

작년만 하여도 거뜬하게 밀고 올라갔는데 올해 50이 넘으니 이 길도 힘겹다.

잔기침 탓인지 큰 찻길에 다다르니 호흡이 매우 가팔라지고 가슴이 쿵쾅쿵쾅 띤다.

잠시 리어카를 정지시키고 살며시 기대어 본다.

오르막을 오르며 조금 달궈진 몸이 차가운 쇳덩이와 맞닿으니 푸득 놀라며 잠시 경련이 인다.

손바닥을 오므려서 경련이 나는 허벅지 부위를 토닥토닥 두들기니 팔딱팔딱 뛰던 살이 조용해진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손..아니 장갑..

언제 구멍이 났는지 검지 윗부분이 뜯어져서 살이 빼꼼히 보인다.

참 작은 구멍인데 그 구멍으로 보이는 손마디가 거칠고 못나 보인다.

구멍 난 장갑 아니 손을 얼른 주머니 속에 넣었다.

장갑의 구멍이 난 곳으로 보이는 손마디가 마치 속살을 보인 것처럼 창피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주책없이 눈앞이 또 부해진다.

"주책이군..주책.."


오늘은 토요일이니 당근하고, 호박, 열무, 시금치를 평일보다 두 배를 더 사서 리어카에 쌓아 올렸다.

토요일에는 장사가 제일 잘 된다. 공휴일인 일요일까지 먹을 것을 사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시금치도 열무도 싱싱하여 잘 팔릴 것 같은 예감이다.

시장으로 들어가서 내 자리에 리어카를 세웠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내 오랜 친구 떡겁이네는 오지 않았다.

지금은 떡겁이네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지만 처음 리어카를 끌고 왔을 때는 온 시장이 시끌시끌 할 정도로 싸움을 하였었다.

떡겁이네는 지금은 주로 쪽파, 대파 등 파종류를 팔지만 내가 처음 왔을 때는 채소류도 같이 팔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생전 처음 보는 이가 리어카를 끌고 와서 채소를 팔겠다고 하니 자리싸움이 붙은 거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 또한 내 자리를 누군가 차지를 한다면 떡겁이네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싸울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너무 절박했다.

무일푼으로 의정부로 이사 와서 할 수 있는 일이 자본이 적게 드는 리어카 장사뿐이 없었다.

리어카의 채소류를 정리하고 잠시 앉아서 뜨거운 보리차 한 잔을 마셨다.

뜨거운 보리차를 후후 불며 마시고 있으려니 "선자네" 하며 그렇지 않아도 큰입을 헤벌리며 웃음 띤 얼굴로 떡겁이네가 리어카를 끌고 왔다.

나는 이 시간이 좋다. 특히 오늘처럼 싱싱한 채소를 싸게 산 날은 더욱 그렇다.

부쩍 추워진 날씨 속에 따뜻하고 구수한 보리차 한 잔을 마시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역시 오늘은 내 예감대로 채소가 잘 팔린다.

보통 오후 네다섯시가 되어야 띠어온 채소의 반 정도를 팔고 나머지는 저녁나절에 다 파는데 오늘은 반나절만에 띄어온 물건의 반 이상을 팔았다. 이대로면 저녁 8시 전에 물건을 모두 팔고 집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집에 갈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닭이라도 한 마리 튀겨갈까 하는 배부른 생각도 해본다.


오늘 저녁에는 귀한 손님이 온다.

여섯째 미정이가 남자친구를 데리고 온다고 한다.

궁금하다.

미정이는 키도 크고 얼굴도 이쁘니 덩치 크고 잘생긴 사내를 데려올까.

아니다. 나도 모르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내가 이런 모진 고생을 하면서 살고 있으면서 외모를 생각하다니..

다른 것 다 필요 없다. 내딸.. 내딸들 고생 안 시키는 사내면 그만이다.

저녁 무렵 딸이 딸과 만나고 있는 사내를 데려왔다.

첫눈에 약간 실망이다.

키가 왜 이리 작나... 얼굴은 완전 싸움꾼 같은데.. 술도 많이 먹게 생겼고..

절을 하고 가만히 앉아있는 모습을 보니 야물딱지게는 생긴 것 같다.

애아버지는 어디 성씨인고.. 무슨 파인고..하는 고리타분한 질문만 한다.

직업은 무엇이고 앞으로 잘 먹고 잘 살수 있는지를 물어보련만...

저녁 밥상을 차리고 밥을 먹는 모습을 보니 참 맛나게 먹는다.

저분 질도 잘 하고 근데 손이 정말 조막손이다.

퉁퉁하게 살이 붙어있고 짧은 손가락으로 저분 질을 참 야물딱지게 한다.

옛말에 조막손은 손재주가 좋다고 하던데 하는 말을 되새기며 위안을 삼는다.

저녁을 어느 정도 먹고 있을 때 우리 집 아이들이 몰려들어오기 시작한다.

둘째딸, 셋째 큰아들, 며느리, 넷째딸, 다섯째딸, 일곱째 딸, 막내 아들....

방안을 꽉 차게 들어오는 식구들을 보고 딸의 남자친구는 놀란 눈이다.

그리고 각자의 질문들을 쏟아내니 어느 말에 대답해야 할지 머뭇머뭇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진정을 시키고 각자 해산하고 30분 후에 술상을 차려서 술 한 잔을 하자며 정리를 하였다.

딸과 남자친구는 거실로 나가고 아들과 며느리한테 남자친구에 대해서 어떠냐고 물어봤다.

아들은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좀 우락부락하고 성격이 사나울 것 같다며 술도 많이 마실 것 같고 혹시 술 주정이라도 있으면 골치 아프다고 말한다.

애 아빠는 남자답고 좋다고 말씀하시고, 며느리도 진실되어 보이고 성격도 서글서글해서 좋다고 말한다.

나는 아직 반반이다.

거실에 저녁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아들이 오늘 술을 많이 마시게 해서 술 먹고 술 주정이 있는지 알아보겠다며 벼르고 앉아있다.

딸의 남자친구는 술상 옆으로 우르르 모여든 딸의 언니 동생들을 보며 살며시 긴장을 하는 눈치다.

아들이 작정을 하고 벌인 술판이라 한 시간여 만에 준비한 소주하고 맥주가 동이 났다.

하지만 딸의 남자친구는 얼굴색 하나 변한 것이 없고 말하는 폼도 매한가지다.

아들은 기가 막힌지 뚱한 얼굴로 술을 더 사 오라고 한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기고 있다.

작은 아들과 딸들은 모두 취해서 하나둘 일어나서 방으로 향한다.

딸의 남자친구는 이때까지도 끄떡이 없다.

술판은 새벽이 되어서야 큰아들이 두 손 들며 끝이 났다. 이때까지도 딸의 남자친구는 멀쩡했다.

아침.. 거실에서 잔 딸의 남자친구는 벌써 일어나서 씻고는 소파에 앉아있다.

나는 속으로 이 정도면 되었다.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서 93살의 꼬부랑 할머니가 되었다.

굽어진 허리는 ㄱ자로 꺾여있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휘어져서 볼썽사납게 보인다.

작은 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우던 귀는 이제는 웬만한 큰소리 아니면 잘 듣지를 못하고,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방바닥에 동전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를 못한다.

아직도 머릿속은 20대 청춘을 생각하는데 몸은 늙어서 말을 듣지 않는다.

어제 선애가 타이르는 말투로 말하던 말이 어렴픗하게 기억이 난다.

“엄마 뭐 먹고 싶으면 돌봄이 아줌마 오면 시키세요. 가스불 켜놓고 잊어버리면 불이 나 불..그럼 우리 살집이 다 타버릴 거 아냐.. 알았지.. 엄마”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가스불을 켜놓고 잊어버린 건가..

가스불.. 내가 왜 가스불을 켜놓았지...갑자기 머리가 멍해진다.

내 딸 선애.. 선애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영리한 내 딸 선애.. 가난한 부모 만나서 가고 싶은 대학도 못 보내줬지만 혼자서 아등바등 살며 우리 두 늙은이들까지 챙기며 살고 있다.

시어머니는 딸만 많이 낳는 나를 많이도 구박을 하였다.

그런데 지금 어떠한가 우리 노부부를 10여 년 가까이 내 딸 선애가 보살피고 있다.

시어머니가 딸만 많이 났다며 온갖 구박을 했었던 그런 딸이 당신 아들인 애아버지와 나를 보살펴주고 같이 살고 있는 것이다.

꿈 자리라도 시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내 딸들이 어떤가 하며 큰소리로 한마디 해 주고 싶은 심정이다.


20대에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버드나무의 나뭇가지가 치렁치렁 길러진 긴 머리카락 마냥 축..쳐져서 하늘하늘 바람 따라 나풀거리고 멀리서 푸른 바닷물이 햇빛을 받아 일렁이고 있다.

내 엄마가 물고기가 넘쳐나게 담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걸어가면서 나를 쳐다보며 “빨래하냐” 며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쳐다본다.

내 엄마다..

내가 방금전에 본 것은 내 엄마였는데... 선한 눈과 얇은 입술이 이쁜 내 엄마였는데.. 갑자기 내 얼굴이 내 엄마 얼굴로 덮여진다.

“아---” 하며 깊게 탄식하듯 큰 한숨을 내쉰다.

눈을 감고 잠시 있는데... "어머니...어머니.." 하며 누군가 나를 깨운다.

나는 퍼뜩 놀라서 눈을 떴다.

나를 돌봐주는 여자가 밥 먹으라고 깨운 것이다.

마음같이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움직여 식탁으로 갔다.

요사이 부쩍 밥맛이 없다.

물을 말아서 먹을까.. 나는 밥을 물에 말아서 먹는 것을 좋아한다.

시장에서 장사할 때부터 갖게 된 습관이다.

바쁜 생활.. 밥 먹자고 편안하게 앉아있는 것도 죄스럽게 생각할 때부터 이러한 습관이 생긴 것 같다.

아침은 빨리 먹고 누구보다 빨리 가서 싱싱한 채소를 한 푼이라도 깎아서 오늘 팔 물건을 사고.. 점심때는 물건을 살 손님이 언제 올지 모르니 밥이라는 것은 맛을 느끼고 먹는다기보다는 살려고 먹는 양식에 불과했었다.

문득.... 나는 왜 이렇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그런가 밥을 먹다가 나도 모르게 이미자가 부른 여자의 일생을 흥얼거린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못하고......”

밥을 먹고 점심 약을 먹었다.

이 약은 나를 참 기쁘게 만든다.

이 약을 먹으면 내 몸을 두둥실 구름 위로 실어서 내가 가고 싶은 먼 옛날로 나를 싣고 간다.

내몸은 내 생각은 차를 타고 가고 있다.

차창 너머로 울긋불긋 단풍이 보인다.

차가 흙먼지를 날리며 터덜터덜 굴러간다.

차 안에는 시장사람들이 한가득 타고 있다.

노래하기를 좋아하는 입큰 내 친구 떡겁이네가 신나게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도 오랜만에 소주 몇 잔 마시고 흥이 오른다.

오늘은 리어카가 없다. 일 년에 한번 우리 억척같은 시장 사람들이 쉬며 놀러 가는 날이다.

내 손에도 리어카 대신 마이크를 잡았다.

시장사람들이 “선자네.. 선자네..” 하며 손뼉을 치며 내 이름을 부른다.

시장의 여느 장사치 와는 다르게 고운 얼굴과 늘씬한 키를 가진 내 인기는 가수 부럽지 않은 인기다.

처음 사징사람들은 시장에 와서 독기 있게 싸우던 모습과 그날 팔려고 띄어온 물건을 다 팔기 전에는 밤늦게까지 시장을 지키는 우왁스러운 모습으로 독한 여자라며 눈치를 슬금슬금 봤었다.

하지만 1년에 한번 가는 나들이를 같이 갔다 와서는 시장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평상시에는 머리에 챙이 넓은 모자와 수건으로 뚤뚤 감싸고 시장사람들 누구나 입고 다니는 몸뻬 바지를 입었었는데 나드리 갈 때 머리를 곱게 빗고 얼굴에도 분을 바르고는 고운 쪽빛 치마를 입고 나온 나의 모습을 보고는 모두 탤런트 같다며 서로 사진 한 장 찍자고 덤볐었다.

"그래 요것들아 나도 잘 챙겨 입으면 을매나 이쁜지 아냐.."

아.. 언제였던가.. 나도 이쁜 날이 있었는데.. 언제였던가...


갑자기 폐가 좋지 않아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

폐에 염증이 아주 심하다고 한다. 의사는 내가 많이 아프다고 하는데 막상 나는 아프지가 않다. 그저 머릿속이 하얗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을 뿐이다.

누군가 들어와서 나더러 “엄마”라고 부른다.

내가 엄마가 되었나.. 언제 엄마가 되었지..

꿈을 꾸는 것 같다.

어제는 교회에 가서 찬송가를 불렀었는데 아니 부른 것 같았는데.. 나보고 일주일 동안이나 병원에 있었다고 한다.

아-그렇지 난 많은 자식을 낳았지.. 퍼뜩 일상의 일들이 실루엣처럼 안개처럼 흐릿하게 생각이 난다.

"누구냐 선미냐.. 선미야..."

대답이 없다.

멍한 내 머릿속에 선미가 보이는 것 같다.

그래 선미 이쁜 딸.. 마음이 착해서 항상 언니나 동생들에게 양보해 주는 너무 착한 내 딸.. 선미.

무의식중에 다시 한번 “선미야” 이름을 불러본다.

선미야 선미야 이름을 부르다 살포시 잠이 드는데....

또 “엄마...엄마”라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난다.

눈이 잘 떠지지가 않는다. 간신히 눈을 뜨니 막내 양희다.

그래 내가 마흔이 넘어서 낳은 내 딸 양희다.

손을 뻗어 잡아본다. 내 아기 양희...


꿈속이다.

어린 내가 보이고... 너무나 이쁜 스무 살의 내가 보이고... 콩닥 콩닥 띠는 마음으로 남편이 된 사내를 살며시 눈을 들어 바라보던 시집가는 내가 보이고...큰 딸을 낳고 신기해하며 젖을 먹이던 내가 보이고... 시장에서 물건 파는 내가 보인다.

아-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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