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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ong Dec 11. 2023

스리랑카에서 전자제품 사는 방법

Ppaarami’s Diary(16)

9월 22일


  한국어를 가르치면 아무래도 한국어가 적힌 문서를 인쇄할 일이 많다. 그런데 내가 다니는 학교의 한국어과(Korean Unit) 사무실에 프린터가 없다. 모던랭귀지학부(Modern Language Department) 사무실에는 번듯한 프린터가 여러 대 있다. 처음에는 매일같이 학부 사무실에 가서 필요한 것을 양껏 인쇄했다. 그런데 점점 눈치가 보였다. 문제는 종이였다. 이따금씩 “양면으로 인쇄를 해라,” 또는 “저게 정말로 전부 수업에 필요한 서류냐?”라는 주의를 들었다. 조금 억울하기도 하고 조금 미안하기도 했다.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스리랑카의 학생들이 종이가 부족해서 시험을 치르지 못한다는 소식이 일찍이 한국에도 전해졌었다. 외화 부족으로 종이 수입이 어렵고 가격도 많이 올랐는데, 눈치 없이 종이를 펑펑 써대는 개념 없는 외국인 노릇을 한 것이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정말로 수업에 필요한 것만 인쇄했고 연결된 여러 장의 문서는 반드시 양면 인쇄를 했다고 항변하고 싶었지만, 의사소통 능력이 현저히 부족해서 포기했다.

  억울함 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조금 더 컸으므로 학과 종이를 더 이상 쓰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한국의 돈으로 프린터와 종이를 샀다. 코이카는 봉사활동 단원들이 활동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비용을 지원한다. 비록 지원금을 신청하고 돈을 받아서 구매하고 정산하기까지의 과정이 상당히 지난하기는 하지만.


   프린터 판매 업체 두 세 곳을 돌아 견적서를 받고, 그중 가장 낮은 가격을 제시한 업체를 기준으로 지원금을 신청했다. 한 달쯤 지나 지원금을 송금받고서 업체에 배송을 요청했다. 그러나 업체는 지금은 그 가격으로는 판매할 수 없다고 했다. 견적을 받은 날로부터 한 달쯤 지난 때였고, 그 사이 환율이 올라 적어도 1.5배는 더 받아야 한다면 판매를 거절했다.     

  업체를 다시 알아보고 견적을 받고, 가격을 네고하느라 진이 다 빠질 때쯤 한 업체를 만났다. 그 업체의 사장은 내가 찾는 모델이 단 한 대 남았다며 정말 저렴하게 주는 거라고 생색을 냈다. 나는 당장 오늘 배송해 달라고 했다. 사장은 배달할 사람을 수배해야 한다며 내일 오전에 배송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물건 값을 지금 입금하면 더 일찍 배송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물건을 받고 돈을 지불해야지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사장이 순진한 외국인을 상대로 돈만 받고 물건을 보내지 않는 사기꾼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물건을 받고 돈을 보내겠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내내 배송이 되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다 사장에게 전화를 했더니 지금 기도 중이라며 통화를 거절했다. 이슬람 신도였던 것이다. 한참이 지난 후 사장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물건값을 먼저 보내지 않으면 물건을 보내지 않는다고 했다.(그럼 진작 그렇게 말을 했어야지...) 그는 나를 순진한 스리랑카 사람에게 물건만 받고 돈은 주지 않는 양아치 외국인으로 의심하고 있었나 보다. 그럼 지금 돈을 보낼 테니 물건을 보내라고 했다. 그의 대답은 

  “못 보내. 사실 어제저녁에 다른 사람한테 팔았어.”

였다.

   구두 약속이야 어찌 되었든 먼저 돈을 보내는 사람한테 파는 것이 스리랑카의 방식이라고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물건이 많으니 원하는 가격을 말하라고 했다. 말문이 턱 막혔다. 한국말로 욕을 퍼부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빨리 다른 업체를 알아보는 쪽을 택했다. 그 후로도 한 동안의 우여곡절을 겪고서야 내가 원하는 프린터를 사무실에 설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종이를 17만 원어치 샀다. 내 임기 내내 부족함 없이 쓸 수 있을 것이다. 학부 사무실에 A4용지 한 권을 기증하기도 했다. 어차피 모두 학교에 기증한 셈이기는 하지만. 

 

  이슬람 사장이 말한, 돈을 먼저 주어야 물건을 보내준다는 방식은 스리랑카의 방식은 아니었다. 다른 업체 대부분은 물건을 보내주고 돈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냥 내가 운이 없었던 것이다. 

스리랑카는 전자제품이 비싸다. LG나 삼성 에어컨은 벽걸이형이 100만 원부터다. 스리랑카 업체가 생산한 반자동 세탁기(세탁통과 탈수통이 분리되어 있고, 세탁이 끝나면 세탁물을 탈수통으로 옮겨 닮아야 한다.)가 20만 원~30만 원 정도에 판매된다. 어디서나 비싼 물건을 거래하는 것은 더 까다롭게 마련이다.

  스리랑카에서 전자제품을 사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내가 아는 방법은 그저 열심히 발품을 팔고 열심히 소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면 생활의 난도가 너무 높아진다. 외국 살이가 힘들게 느껴진다. 한국에서는 손가락을 놀려서 인터넷 창을 켜는 것으로 구매가 시작되고, 인터넷 창을 닫는 것으로 구매가 거의 마무리된다는 것과 비교되고, 비교하니 서글프고 고달파진다. 여기에서도 인터넷 쇼핑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물건을 보고 돈을 지불할 것을 추천했다. 중고 거래가 아니라 업체로부터 새 제품을 사는 경우에도 그렇다. 비쌀수록 더더욱. 


  나는 현지인의 도움을 받고서야 무사히 프린터를 살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해보겠다고 버둥거렸다. 혼자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해서 도움을 청했으나, 애매하게 도움을 청하면 그들도 애매하게 도와주었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도움을 청해서 필요한 것들을 얻어야만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빔프로젝터가 필요하다. 한국어 교실에 있는 빔프로젝터는 랜덤으로 작동한다. 어떤 날은 되고, 어떤 날은 안 된다. 열심히 ppt를 만들고, 동영상을 준비하고도 못 쓰는 날이 많았다. 양질의 수업을 위해 빔프로젝터를 사야 한다. 사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골치가 아프다. 그래도 이번에는 시행착오가 훨씬 덜 할 것이다. 도움도 받아 본 사람이 잘 받을 테니까, 도움을 잘 받아서 좋은 빔프로젝터를 사보아야지.


최근 콜롬보에서 문을 연 가전제품 매장이다. LG냉장고가 200만 원대에 팔린다. 양문형도 아닌데.


반자동 세탁기. 어릴 때 집에서 썼던 짤순이가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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