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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ong Jul 05. 2024

2. 부정 : 나의 집주인이 그럴 리 없어

  엘리베이터 내부에 이런저런 게시물이 붙어있다. 

  4월에 건물주가 [사과의 말씀]을 붙였다. 


경매등기로 인해 세입자들이 고통받고 계신 점 사과드립니다. 오피스텔 관리 미비로 인해 세입자분들의 고통을 가중시켜드려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번 경매건은 반드시 해결할 것을 약속드리며, 건물관리에도 문제가 없도록 하겠습니다.

세입자 분들께 피해를 끼쳐드린 점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과드립니다. 이와 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지만 현재 건물주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두 달 후 [사과의 말씀] 옆에 세입자 중 한 사람이 새로 글이 붙였다. 

‘어느 날 인터넷이 끊겨 관리인에게 상황을 문의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이 글은 건물 관리가 안되어서 수도세, 인터넷비용, 승강기 점검비용 등이 미납됐으며 집주인은 해결 의지가 없어 보인다는 것이었다.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날릴 걱정에 더해 당장 건물관리 대책을 세워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건물이 경매에 넘어가도 세입자들은 그 건물에서 계속 생활을 해야 한다. 계약 기간보다 더 길게 살게 될 것이다. 건물 출입구 안으로 폭탄이 들어앉았더라도 우리는 매일 같이 먹고 씻고 잠들어야 하므로 수도가 끊기지 않도록, 인터넷이 제대로 작동되도록 수를 내야 한다.      



  나는 집을 비우고 있었기 때문에 인터넷이 끊긴 상황을 경험하지 못했다. 경매 관련 통지문을 받지도 못해서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절망적인 세입자의 글보다는 임대임의 글을 더 믿고 싶었다. 그걸 믿어야 마음속에 한줄기 희망을 간직할 수 있으니까. 한줄기나마 희망이 있는 게 낫지 않나. 번거롭게 사과의 글까지 써서 붙인 사람이면 해결 의지가 있는 거겠지, 양심은 있는 사람이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게 처한 상황을 부정하면서 일주일을 그냥 보냈다. 죽음이나 커다란 상실을 받아들이는 첫 번째 단계를 통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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