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첩 #1
뉴질랜드 워킹 홀리데이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뉴질랜드의 가장 큰 도시인 오클랜드에서 한인 정비사분을 통해 차량을 검사한 뒤 구매하고,
타우랑가 지역으로 내려갔다.
애초에 많은 정보를 알아보고 가지 않았던 지라,
키위 수확 시기인 줄도 몰랐다.
키위 수확이 시작되기 직전인 시기라 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문자를 보내도 읽씹을 당하거나, 이미 세입자를 구했다는 답장뿐.
당연히 오클랜드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은 도시여서
비교적 쉽게 방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던 생각은 내 착각이었다.
그렇게 뒤늦게 다른 지역에도 이력서를 돌려보다가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왔고,
다른 지역인 타우포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이동하기 전에 주변이나 둘러보기 위해
약 한 시간 떨어진 와카타네(Whakatane)로 운전대를 향했다.
하필이면 내가 가장 싫어하는 비가 오는 하루였다.
한 시간의 운전동안 폭우가 내리다가도 추적추적 내리기도 했지만.
이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다행히 비가 그쳤다.
나는 비가 오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우산을 기본으로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은 필수요,
양말이나 바지가 젖게 되니까.
차라리 눈이라면 즉시 젖지도 않고, 털어내면 그만일 뿐인데, 비는 굉장히 귀찮다.
그렇게 Ohope Beach에 도착했는데,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먹구름이 가득한 흐린 날씨였다.
더구나 23년 초반에 뉴질랜드를 강타했던 사이클론이
해변가 주변을 초토화시켜두었다.
걸을 수 있는 데크 길은 아예 출입이 통제되어 있었고,
해변가에는 여기저기서 날아온 나무와 나뭇가지들이 널부러져 있었다.
바람도 세차게 불어 낙엽이나 모래가 조금 날리긴 했지만
강아지를 데리고 온 한 가족은 열심히 뛰어놀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두긴 했지만,
다시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이 곳의 풍경을
고작 흐린 날씨로만 보고 간다는 게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렇게 미리 예약해둔 에어비앤비에서 하루를 보내고,
체크아웃 하기 직전 지진까지 느낀 뒤 다시 타우랑가로 출발했다.
와카타네를 떠나자마자 날은 급속도로 맑아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해가 뜨기 시작했다.
가는 도중에 철길을 건너면 나오는 작은 해변가에 차를 세우고 감상했다.
사실 이 때까지는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냥 여행 내내 맑거나, 흐리거나 둘 중 하나였을 뿐.
이렇게 직접 몸으로 느끼고 나니,
예상하지 못한 긍정적인 생각들이 몰려왔다.
당연히 여행지에 가서 흐리다면 아쉬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행지를 찾아볼 때 주로 접하는 사진은 맑은 날의 잘 찍힌 사진일 테니까.
물론 맑은 날을 보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흐린 날이 더 희귀한 경험일 수 있다.
짧은 여행이라면 흐린 날만 구경하다 올 수도 있겠으나
흐린 날이 있다면 맑은 날로 날이 개는 때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장마라면.. 뭐 잘 모르겠다.)
이 때를 기점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씨가 바뀌었다.
단순히 구름 없는 맑은 날이 좋다고 막연히 생각해왔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흐린 날 뒤에 따라오는 날씨가 개는 날이 좋다.
비가 온 뒤에 수증기로 증발하며 시원해지는 공기와 함께
아직 채 사라지 못한 수많은 구름들이 어우러진 그 날씨가 참 좋아졌다.
전에는 비가 오면
"젠장, 또 비야." 하고 짜증이 몰려왔었다.
하지만 이제는 비가 온 뒤에 따라올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씨와 무지개를 기대하게 된다.
너무 진부한 말일 것 같지만,
인생에서도 대개는 비가 오고 개는 날들이 반복된다.
비가 올 때 짜증을 내며 받아들이기보다는,
앞으로 다가올 것들을 기대하며 비를 잘 이겨내보자.
운이 좋으면 무지개도 보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