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이언트 말 '만' 듣지 마세요.
시공은 초반에 나온 시안대로 진행되기 어렵다. 첫 시안은 클라이언트가 말한 느낌을 토대로 디자인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영감이 고춧가루 마냥 팍팍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1차 시안을 바탕으로 클라이언트와 소통을 통해 '이 부분은 수정하고, 이 부분은 제외하고…'와 같은 수정 과정을 거쳐 클라이언트와 원하는 방향성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다. 대표님의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그렇게만 생각했다.
"클라이언트의 방향성에 맞추는 것도 좋지만, 디자이너로서 공간을 어떻게 해야 더 효율적이고 예쁘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생각하고 제안하는 것도 중요하다."
초보 디자이너로서 '클라이언트 말을 100% 수용해야지!'라는 생각에 몰두해 있던 나의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파악하고 그에 맞춰 공간을 기획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된 이상 니즈에 맞춘 새로운 솔루션을 제공하는 것 또한 우리의 일이라는 말이 내겐 참 와닿았던 것 같다.
호텔 프로젝트 때도 그렇게 진행했다. 발단은 클라이언트 측에서 중정을 넣고 싶다는 것이었다. 중정이란 건물 안이나 안채와 바깥채 사이의 마당이라는 뜻으로 쉽게 말해 공간 중앙이 동그랗게 뚫려 외부로 구분되면 중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정을 넣으려면 공간이 수직으로 뚫릴 수 있게 전 층의 중정 공간을 따로 빼야 하는데, 이 위치를 어디로 할 것인가부터가 풀어야 할 과제였다. 즉 니즈를 수용하되 디자이너의 영감을 담은 새로운 시안을 제안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소소한 문제가 생겼다.
위치를 정하고 시안을 잡으려는데, '그분'이 집을 나가셨다. 영감님(inspiration) 말이다. 빈 공간에 뭘 넣어도 안 예쁘고, 이를 어떡하면 좋나 싶어 떨리는 동공으로 하염없이 모니터만 보던 그때였다. 실장님과 대표님이 레퍼런스와 디렉션을 주셨다. 이런 이미지를 참고해 보는 건 어때요? 이런 식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요?
아주 멋진 결과물이 탄생했고, 그대로 시안을 잡고 미팅 때도 보여드렸다. 다행히 클라이언트 측에서는 제안드린 시안을 마음에 들어 하셨다. 대표님과 실장님의 가호 덕분에 위기를 만회했다. 하마터면 기한을 맞추지 못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