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유럽 여행 중 유일하게 열차에서 잠을 잔다.
내일 아침 9시까지 계속 열차만 타고 이동해야 하는 날이다.
그야말로 열차 여행이다.
이태리 나폴리에서 밀라노, 스위스 바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함부르크로 하루종일 그리고 밤새도록 달린다.
아침은 호텔식으로 먹고 저녁은 1등석에서 제공해 준다.
나머지는 벼리가 그동안 저축해 둔 음식으로 준비하였다.
가끔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참아 가며 여행을 한다.
서양식을 하니 위에 부담은 없어 좋은 점도 있다.
자극성 있는 재료가 별로 없고 모두 밋밋한 맛의 음식이다.
"매콤한 아귀찜으로 입 안을 화끈하게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틀림없는 한국인 인가 보다.
"매운 아귀찜을 왜 먹는지?"
일부러 찾는 일이 전혀 없는 벼리는 이런 식단이 맞단다.
과일과 샐러드와 빵과 견과류, 콩 등 한국에서도 비슷하게 먹었으니까...
현미밥 대신 빵으로 대체된 것뿐이다.
벼리는 맛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안 되고 음식에 입맛을 맞추면 된단다.
"난 뭐든 맛있는데."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으니 감사하다."
같은 식단으로 평생 먹고살아도 살 수 있단다.
특이하다.
하기야 알약 하나만 먹고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던 벼리였으니 충분히 가능하겠다.
나는 갖가지 맛을 즐기며 살고 싶다.
식단이 달라도 너무 달라 힘들 때가 가끔 있다.
오전에 시간이 있어 베수비오산 가는 길 쪽 나폴리 해변에 갔다 올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열차 왕복 시간을 빼면 30분 정도밖에 없어서 호텔 주변을 둘러보기로 했다.
어디를 가든 역 주변에는 볼거리가 모여 있다.
오며 가며 놓쳤던 시장을 제대로 보기 위해 들어서니 대부분 흑인들 가게였다.
약재 같은 것을 봉지 봉지 담아 놓았거나 작은 통들 속에 뭐가 들었는지 줄을 세워 놓았다.
일일이 묻기에는 너무 많다.
뭔지 알 수 없는 재료들은 약재인 것 같다.
'사서 달여 먹을 수 없는 상황이라 관심을 끄자.'
흑인들이 파는 물건들은 희한한 것들이 많아 구경거리로 재밌다.
새 상품인지 중고물품인지 모르나 깔끔하게 보이지도 않았다.
살 수도 없지만 사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10일 후면 아프리카로 가는데 모두 이런 것들만 모아 놓지는 않았겠지?
여행을 다니면서 매일 쇼핑한 경력 2개월인 벼리.
물건 값을 훤히 꿰뚫고 있다.
"이 시장은 품질도 안 좋으면서 비싸다."
우리나라 시장에서 만원이면 사는 옷이 20유로 란다.
"난 그저 주도 안 입을 옷을..."
옷가게는 더 볼 것이 없으니 다른 곳으로 가자고 했다.
다른 가게에서는 오래 보더니 여기서는 몇 초만에 이동이다.
가다 보니 어느 가게 앞에 줄을 길게 서 있었다.
"뭔 일이래?"
궁금해서 줄 옆으로 살짝 들어가니 휴대폰을 소독하고 닦아서 필름을 교체하고 있었다.
돈을 주는 사람도 있고 그냥 받는 사람도 있었다.
돈을 주지 않는 사람의 얼굴은 환하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 더니 공짜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아시나요?
우선은 기분이 좋다.
필름을 교체한 사람들이 폰을 받으며 점원의 얼굴을 찍는다.
한 손은 턱을 괴고 다른 손은 V자 모양을 하고 입술을 뾰족 내미는 모습의 자신이 스타인 줄 아나 보지.
교체하고 나가는 사람들이 줄줄이 사진을 찍고 있다.
'뭣 때문에 찍는 거지? 예쁘지도 않은데...'
웃기지도 않은 일이 많다.
조금 지나니 빵 냄새가 솔솔 풍긴다.
코에 부드러운 향이 닿는 곳에 다다르니 또 줄을 섰다.
여긴 유명한 맛집인 것 같다.
화덕에서 갓 구운 빵을 하나씩 들고 가게 앞 주변에 서서 먹고 있었다.
이틀 전 베수비오산 가는 버스정류장 앞 젤라토 아이스크림가게의 풍경이 재현된 듯하다.
"어, 맛집은 그냥 갈 수 없지."
'일부러 찾아가지 않으면 만나기 어려운 맛집인데 한 개만 사 볼까?'
약간의 갈등이 스쳐 지나갔지만 아침을 먹은 지 얼마 안 됐고 여행 중 빵을 많이 먹어서 안 당겼다.
사 오는 사람들과 먹는 표정을 관찰했다.
금방 구운 빵을 먹으면서 행복해하는 저 사람들.
유럽인의 주식이니 길거리 아침 식사일 테지.
들고 다니면서 한 입 베어 물고 "우직 우직 냠냠~~"
벤치나 공원에서 "쩝쩝 꼴깍~~"
이렇게 먹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우리나라 음식은 유럽인들처럼 먹기가 쉽지 않다.
이 또한 문화의 차이겠지.
역 주변 동네 한 바퀴를 두 시간 동안 여유롭고 찬찬히 그리고 거창하게 마쳤다.
캐리어를 끌고 역으로 "덜덜덜, 뚜벅뚜벅" 걸어갔다
이태리의 남부에서 유럽을 종단하여 북으로 올라가는 열차 안에서 노트북을 켜고 우리나라 뉴스를 들었다.
우리나라에 사상 처음으로 내일부터 종단 태풍이 온다는 데 별일이 없었으면 한다.
매년 장마통에 물난리를 겪는 걸 보면 근본적인 대안이 없는지 참 답답한 느낌이다.
유럽의 나라들은 평온 그 자체인 것 같은데...
행복을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 같다.
자연재해나 전쟁 등 근본적이고 잠재적 스트레스는 적은 것 같아 보인다.
이런 생각을 하는 가운데 열차는 쉼 없이 달려가고 있다.
밀라노에서 바젤 가는 열차 중간에 흑인 세 명이 탔다.
"어, 일 등실에 흑인이 타네. 또이~?"
순간 예감이 이상했다.
흑인을 무시하는 건 아닌데 차림새가 조금 아닌 듯했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보안요원 남녀가 표를 요구했다.
몰래 무료 승차를 했는지 발각되어 잡혀서 출입문으로 갔다.
'어떻게 되었을까?'
잘 되었으리라 본다.
멋쟁이 흑인들도 많다.
온갖 액세서리로 치렁 치렁 치장을 하고 명품백을 메고 큰 엉덩이를 살래 살래 흔들며 다닌다.
머리 모양과 옷맵씨가 부자 같아 보인다.
가끔 일등석에 부부 또는 가족이 타는 걸 봤는데 조금 전에 탔던 흑인은 그렇지 않았다.
처음 탔을 때는 열차 안이 고요했었다.
어느 지점으로 통과하는데 이상하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커졌다.
중간 역에서 올라 탄 어떤 아주머니의 아들이 발달장애아로 발작 증세 같은 현상을 보였다.
"아아앙 가강 야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괴성을 질렀다.
승무원이 빈자리로 옮겨 주며 건너편 노부부에게 양해를 구했다.
고요한 열차에서 지르는 소리는 1시간 넘게 이어지더니 중간쯤에서 내렸다.
장애를 가진 부모들의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평생 아픔을 안고 살아갈 것 같다.
아이들과 내 주변에 있는 분들이 건강해서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밤늦은 열차 안의 풍경은 모두 어리둥절 어색하기만 하다.
일단 조금이라도 자자. 새벽에 갈아타야 하니까...
나폴리 아침 맛집빵 가게 앞
나폴리에서 스위스 가는 열차
스위스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