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혁의 에쎄이 4
<연희동 일기, 저기압일땐 고기앞으로>
“생존을 위한 술과의 전투, 아직도 쓰디쓴 인생에 패배하고 있는 자들이여. 당신들은 오늘부터 또 하나의 미션을 받았으니 엄한 곳에 분풀이하지말고 이 자리에서 술과 함께 하소연합세.”
사장님의 얼큰한 목소리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입구 가게에서 심상치않게 들려오는 녹음본이었다. 마치 에버랜드 호러사파이같았다. 입구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306보충대를 연상하게하는 각종 조교들이 입는 군복과 빨간 레인저 모자,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이 노래가 계속 귓구멍으로 쑤셔 들어왔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메뉴판을 먼저 구경하시지 말입니다."
(어디서 낯이 익은 말투에 휙 고개를 올려보았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순간 당황한 표정으로 조교 차림의 직원을 3초간 쳐다보고) 아.. 네.. 여기 흑돼지 3인분이랑 아까 입구 앞에 걸린 멘트보니까 소주 10병까면 3병 삭감해 주신다고 하시던데. 맞나요?”
“네 선배님, 오늘 술과의 전투에서 이기시면 소주 3병, 즉 9000원은 바로 삭감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남성 3명이서 오셨는데 다들 예비역이십니까? 전역하셨습니까?”
그 상황을 지켜보던 N형님은 다짜고짜 인상을 찌푸리면서 한마디 던지셨다.
“아니 그럼 우리가 현역으로 보이십니까? 후배니-이-임?”
“아..아닙니다. 그저 워낙 동안이셔서 제가 잠시 착각했지말입니다. 그럼 바로 흑돼지 3인분이랑 소주 뭘로 제공해드리면 되겠습니까?”
이 맛에 갑자기 상황극처럼 빠져버린 우리들이었다. 순간 이 직원분을 놀리고 싶었다. 대충 외관과 말투, 그리고 어조와 행세를 보아하니 우리보다 5살 더 젊었던게 분명하다. 그러니까 대략 22살이거나 23살이겠지. 아, 그럼 엄청 어리잖아? 순간 직원에게 농담따먹기를 하고 싶었던 K는 갑자기 또 본능적인 싸이코 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어쭈,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2년 넘게 근무한 이 형님에게 되겠습니까아-? 진짜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후배님! 나 여기 연희동 토박이이고, 저-기 연희동 북쪽 OO카페 사장님입니다! 그리고 자네 기수 몇 번인가? 조교라고 좀 봐주려고 했더니만 너무 우리를 만만하게 보는거 아닙니까! 후배니-임?
순간 당황하던 직원분은 생기있던 웃음기가 싹- 사라지더니 당황한 여력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선배님들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실 사장님이 이렇게 컨셉으로 잡으라고 시킨거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제가 저기 강원도 예비군 중대로 있다보니 예비군 선배님들만 보면 가끔씩 이런 말버릇이 나오더라고요. (속으로 분명 우리를 욕하고 있을게다.) 부디 너그러운 양해 구하시고 얼른 음식 갖다드릴테니 소주 종류 말씀해주세요.”
우리는 서로 눈으로 텔레파시를 맞추더니 곧바로 가족오락관처럼 합심일체로 답안을 내놓았다.
“한라산 10병!”
그러더니 N형님은 조심스럽게 한마디 툭 던지셨다.
“아, 나 원래 비건인데 소주도 참 곡물이잖아? 오늘 다시 비건으로 돌아가야겠다.”
“하하. 그럼 한라산 10병인거죠? 알겠습니다. 바로 갖다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주문서에 한라산 10병, 흑돼지 3인분이 기재되었다. 가격은 무려 70000만원. 생각보다 저렴했던 가게. 아마도 오픈 기념이라 할인 흥정을 하는 상황이었고, 더군다나 도수가 높은 술일수록 더욱 가격이 저렴해지는 창조경제였다. 덕분에 느닷없이 우리의 표정은 밝아지기 시작했다.
직원이 가자마자 우리는 모두 긴장이 풀렸는지 내심 편안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K는 갑자기 자신의 새로운 여자친구를 보여주겠다며 또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K의 버릇은 정말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이미 전에 이야기했던대로 그 중 하나는 술만 마시면 자기 본인을 억제하지 못하고 ‘개’가 된다. 그리고 남을 헐뜻는 아주 못된 고약한 심술이 있으며,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야야, 봐봐. 나 오늘 인스타 팔로우 또 올랐다니까? 이야 이러다 만명 찍겠어! 진혁아 넌 나를 좀 본보기로 봐야한다. 나 진짜 이러다가 연예인되는거 아니냐? 시기상조아니라고!”
“(언제 그랬냐면서 역시나) 그래그래. 부럽다. 좋겠다. 잘났다. 오늘 술로 너 조져야겠다. (중얼중얼)”
“뭐라고? 방금 뭐라고했냐?”
“어? 어 아냐 그냥 또 나만의 망상이 나오기 시작했네. 하하하”
또 신장개업한 이 가게 내부에서 싸움이 일어날 듯한 분위기에 N형님은 우리를 오히려 말리기는커녕 조용히 밖으로 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계셨다. 그리고 전자담배를 뭉게뭉게 피우면서 목소리가 점점 커지셨다.
“어, 그래그래. 아니 오늘 신장개업한 어느 고깃집에 왔는데 남자 3명이서 한라산 10병은 너무 무리수같더라. 아니 내가 또 꼬장부린게 아니라 오늘 처음 본 녀석이랑 진혁이가 그렇게 시켰다니까? 아오 나도 몰라. 그래서 그러니까... (중략) ... 아무튼 온다는거지? 어어. 여기 주소 찍어줄테니까 알아서 기어와. 어어 그려. 어잉~”
“진혁아 내 말 왜 무시하냐? 어? 인스타 계정 이정도 되려면 넌 아직 멀었어. 짜식아”
“아니.. 그게 아니라 N형님 방금 웃은거 너도 봤냐?”
“하. 그게 중요하냐. 또 내말 무시했네. 진짜 너무하..”
갑자기 N형님이 가게 입구로 다시 들어오면서 손을 허리 뒤로 감춘 뒤 복명복창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결의! 우리는 국가와 국민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의 육군이다!”
갑작스러운 그 소리에 우리는 어벙했다. 그리고 순간 K가 한마디 던졌지.
“야, N형님 술도 안마셨는데 왜 저러시냐. 빙의되신거아냐? 여자친구랑 헤어졌나?”
순간 나도 아찔했다. 이 형님 또 예술혼 정신이 여기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형님의 버릇을 이야기한다면 기분이 좋으시면 그냥 즉흥적으로 자신의 본능적인 느낌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어떤 상징체이든지 상관없었다. 그저 장소든 물체인든 사물이든 인간이든 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예술을 강구하고 표현하려고 하신다.
그런데 하필 장소가 ‘군대 분위기 고깃집 가게’라는 점이었고, 이 형님이 고깃집 사장님에게 한마디 상의 없이 프런트 앞에 있는 DP형 조교 군복을 갈아 입더니 이내 레인저 모자를 착용하기까지 불과 1분이 걸렸다. 옷을 갈아 입은건 다행이 아니었다. 단지 위에 걸쳐 입었을 뿐인데 그 과정을 지켜보던 직원분과 사장님은 마치 동물원 구경을 한 듯이 천천히 요리를 하시면서 고개는 N형님 방향으로 향해있었다.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파워레인저가 떠올랐다. 3초 뒤 깨달음을 얻고 갑작스러운 웃음이 터져버렸고 이내 K마저도 나보자 2배 더 큰 목소리로 거창하게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인근에 있던 모든 사람들도 엄청 박장대소하더니 어떤 대학생 한 분은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N형님께 사진 찍자고 들이댈 정도였다. 그걸 또 좋다고 받아들이는 형님은 조금 있다가 같이 착석하자면서 자기만의 망상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형님, 다 좋은데 그 군복 안 벗을거에요?”
“아, 맞다. 얼른 벗어야지.”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장님은 이내 흡족하시더니 N형님께 이런 말을 남기셨다.
“아니에요. 덕분에 가게 분위기도 좋아졌고, 원래 신장개업이면 이런 분위기가 맞잖아요. 아까는 너무 조용했거든. 하하하하 덕분에 서비스도 드릴게요. 아이고 너무 감사드립니다.”
이 말과 동시에 갑자기 요리 손놀림이 바빠지는 사장님은 이윽고 N형님이 부쩍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아까 우리 주문 받던 직원분은 표정이 울상이었다. 분명 이러다 잘리는게 아닌가 싶기도 했겠지. 괜스레 미안해지는 나였다. K는 그저 싱글벙글 남의 관심도 전혀 없는 전형적인 싸이코 기질을 펼치기만 급급했다. 또 직원 놀리려고 작정했나보다.
아무튼 이야기가 길었다만 어느덧 등장한 흑돼지 3인분과 한라산 10병, 그리고 그 병들이 담겨진 아이스 버킷까지. 마치 오늘을 마지막 전투임을 잊지말라는 듯이 버킷 앞에는 “대한민국육군, 강한육군”이라는 표식이 정확히 적혀있었다. 호돌이는 덤이었다.
생각해보니 2013년 1월 초 일병휴가때 동서울 어느 노포에서 친구랑 1인당 술 5병씩 마시고 그 근처에서 노숙한 기억이 난다. 그때 소대장님한테 전화오고 심각하면 오대기가 터질 직전이었는데 마지막 전화를 받고 용서를 구하고 부대로 복귀했던 기억이 난다. 일명 군대 고문관이 되기 직전까지 갔었던 그 일병 휴가 이야기. 참으로 구슬픈 이야기같지만 대한민국 남자라면 보통 한번씩 휴가 때 이런 근본 없는 사건이 터지기 마련이더라. 지금은 하나의 추억으로 매김되었다만 당시에는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아직도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마치 옆에 소대장님이랑 중대장님이 같이 있을 듯 했거든.
고기를 집으려고 했지만 당시 순간이 기억나서 손이 벌벌 떨렸다. 그러더니 K가 짜증내면서 그것도 못 굽냐면서 또 잔소리를 하더니, N형님은 그 복명복창 이후로 계속 웃기만 하더라.
‘아, 뭐랄까. 술도 안마셨는데 왠지 오늘 또 그러런 날인가보다. 아디오스 ._.’
<다음화에 이어집니다.>
#갓혁의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