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마을이라는 곳에 가보았다. 갑작스러운 장마로 땅이 질퍽질퍽하였고 사람들은 강풍을 막기 위해 애써 우산을 짐처럼 짊어들고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었다. 빨간 스냅백을 착용하신 할아버지는 구수한욕설을 하시면서 오늘따라 날씨가 무척 안 좋다며 하소연을 하셨고 쓸쓸히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그 옆에는 할머니께서 유모차를 이끌고 어디론가 이동 중이셨지. 인근에는 태권도 복을 입은 초등학생 친구들이 하하호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웃고 있었다. 제주도라고 다를 바 없었다. 그저 사람 사는 곳은 어딜 가나 다 똑같구나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나는 어디론가 사색하면서 걷기 시작했다. 용담마을은 내가 알고 있는 조그마한 골목 동네가 맞았다.
용연계곡에서 뻗어 나오는 한천을 벗 삼아 비가 내린 이 골목길을 조심히 걷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에 나는 잠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낯이 익은 한 장소를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했다. 사람들이 머물렀던 그 자리였고 역시나 소박하고, 군더더기 없는 낮은 주택 단지라 더 마음에 와닿던 곳이다.
내가 살고 있는 강서구 마곡동 인근 버려진 군부대에는 강서구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위한 자그마한 '도심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 농장 일에 직접 몸을 담근 사장님께서 운영하시는 모양이었다. 버려진 군부대의 폐쇄적인 느낌을 주민들에게 공공생활 의미를 부여하며 한편으로는 지역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자 했던 취지는 분명히 대단하였다. 덕분에 그 사장님으로부터 도심 농장에 대한 운영 방식과 그로 인한 긍정적인 결과를 잠시나마 배웠던 기억이 난다.
멋도 모르고 병장 전역을 앞둔 예비 사회생과 친해졌던 어느 위병소 앞에서 수다를 떨다가 그 과정에서 농장 주인님께 혼줄이 났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친해져서 가끔 꽃구경이나 원예 작업하러 나갈때 종종 들리게 되었다. 감사합니다.
그 기억에서 비롯되었는지 제주도 용담동은 전체적으로 그러한 도심 농장과 힐링 로컬 구역 같았다. 특히 집 앞마당 잔디를 배경으로 쓰러져가는 고목을 활용한 자연적인 벤치과 의자가 있다는 점과, 인근 버려진 화분을 모아 업사이클링(새로운 작품이나 제품으로 활용)하여 보기 좋은 화분 단지로 연달아 줄지어놓은 점이 그 사례였다. 작디작은 집들 사이사이에 페인트를 칠하며 제주도스러운 자연 친화적인 공감대를 만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걷기 좋은 길'을 연상케하였다.
그동안 내가 바라고 바랐던 '걷기 좋고 살기 좋은 골목길'이라는 취지에 딱 맞는 장소가 바로 '제주도 용담동'이었다.
한천 인근 골목길을 곳곳 거닐다가 어느 아담한 카페를 발견하였다. 마치 서울 성북동의 어느 주택을 연상케하며 옥상 위에 올라가 뜨거운 햇살을 바라보며 벤치 위에 누워 책을 읽으며 사색하고 싶은 그런 구조였다랄까.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그 장소로 이동하였다. 사실 이곳은 낯이 익었다. 블로그를 통해 '형섭'님을 뵈었고 직접 찾아간 것은 처음이었다.
스테이 굿 무드
카페 스테이 굿 무드는 조용한 분위기를 추구합니다.
공간에서 머무르는 동안 지인분들과 작은 소리로 대화해 주시기 바라며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이 분위기를 충분히 느껴주시기 바랍니다 :>
마음의 심금을 울리는 조용한 노래가 내 귓가에 들려왔다. 사장님은 평소에 미니멀한 물건 수집에 관심이 많으신 모양이었다. 왜인지 그날의 정서에 따라 정성스럽게 큐레이션 할 듯한 소장품과 창작품들을 서랍과 책상 위에 고스란히 올려놓을 것만 같고, LP 감성 충만한 노래의 연속은 이 조용하고 아담한 카페에 녹아내려가고 있었다. Melt down for my mind-
그리고 사장님만의 특제 커피를 주문하였고 조용히 음악을 감상하며 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나의 묵혀있던 정서와 감성이 그날따라 커피와 함께 입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갑자기 육지에 있었던 일상 생각이 났다. 평상시 바쁘게 지내왔던 나를 다시 되돌아보았다. 제주도 용담동의 풍경은 마치 원래부터 그런것처럼 조용하고 여유롭게 나를 달래주고 위로해주고 있었다. 마치 나를 기다린 것처럼.
여전히 밖에서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나의 1회용 우산은 어느새 망가졌지만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서서히 비가 그치기 시작할 무렵 다시 한 번 더 곳곳에 숨겨진 보물을 찾듯이 나는 이 카페 구석구석 구경하기로 했다.
Stay good mood
블로그를 볼때마다 사장님은 사진을 잘 찍으셔서 매번 감탄했었다. 아이폰 감성이라고는 말씀하시지만 사실 '사진에는 내면이 숨겨져 있기에 그렇게 보였던 것 같다.'
그 사람의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서 우리의 사진에서는 그날의 감성과 농도, 온도가 짙게 녹여져 있다. 매번 볼 때마다 한번 와보고 싶었다는 생각만 남긴 채 제주도행 비행기 안에서 바로 노트에 적어내렸지. '스테이 굿 무드에 가서 30분간 사색해 보기'
더군다나 큐레이션 감성을 물씬 받아 마치 사장님의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 들으며 나의 감성적인 서평을 작성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런 분위기는 언제나 찬성이다. 서촌의 독립서점을 들릴 때마다 그 다녀간 작가의 협업 미팅 프로젝트를 통해 나의 느낀 점을 포스팅에 붙여놓고는 했다.
사실 우편이나 포스트잇이라도 가져오면 좋았을걸 후회한다. 이내 사장님께 어색하지만 반가운 눈웃음과 표정으로(사실 마스크로 가려져 있어서 어색하여 벌벌 떨리는 나의 진한 표정을 못 보셨을지도)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사장님 이 작품들 굉장히 좋네요- 아 혹시 블로거 형섭님 맞으시죠" (진짜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지금 생각해도 어색할 지경)
"어- 네네 맞아요. 잠시만요. 갓혁님이시구나. 예전에 포스팅에 뵌 적이 있어요. 그리고 이웃님들이 스굿무에 방문해 주시면 항상 감사의 마음을 전달드리고자 저만의 소소한 선물 제공해 드리지요" (찡긋?)
"오 저를 기억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혹시 여기 맛집 알고 계시나요? 저 지인이랑 같이 밥 먹으러 나갈 예정이라서요. 살포시 추천 부탁드립니다. 하하"
"아 네네- 도갈비 추천드립니다! - "
어색함을 끊기 위한 하나의 방도였을까. 나는 먼저 말을 걸었던 상황이 이제 나갈 때쯤이었다. 노형동에서 지인을 만나기로 했기에 아쉬운 마음에 잠깐 몸을 일으켜 사장님과 마지막 이야기와 일상, 그리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쉬운 마음으로 스굿무의 밖을 나선다.
사진에는 사장님이 그동안 찍어두며 자신의 감성을 녹여낸 사진들이 담겨 있었다. 뒷장에는 글을 쓸 수 있는 메모와 엽서 기록란이 있었고, 나갈 때 차라리 이 사진 뒷장에다가 메모를 남기고 떠나면 좋지 않았을까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계속 생각이 났다. 아무튼 제주도 용문동은 나에게 신선한 느낌은 물론이요,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고, 그 동네가 가지고 있는 풍경을 내 글로 기록하기에 아주 적당하였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머릿속으로 상상되어간다.
동문시장과 산지천, 한천, 용연계곡, 용담동, 구제주, 제주시외버스터미널. 이 모든 것의 적절한 조합은 그 동네에 숨을 불어넣어주는 로컬이자 하나의 생태계를 보여주는 듯하였다. 잇따라 생각이 들었지만 제주 시내에 있는 동안 애월이나 성산처럼 멀리 나갈 이유는 없어 보였다. 그저 그 아름다운 동네에서 사람들의 웃음과 정취를 구경하며 비 오는 날을 하나의 기록으로 남겨놔야지.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