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 어느 청년의 이야기를 담았어.
나는 오로지 자유로운 삶을 갈망했지만 쉬운 부분이 아니었지. 그래서 더 힘들다는 핑계로 늘 타인들에게 꾸짖음의 대상이었으며 한편, 열정과 열망의 대상이었다.
그랬던 내가 코로나 시국이 장기화되면서 꽤 많은 감별과 차별의 원칙을 스스로 정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또 하나의 기회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작년 9월부터였을까.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코로나에 얽매인 나 자신을 꿰뚫고 파괴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스스로답다’는 원칙을 가지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모르겠다.
딱 정리해서 말하자면 이 3가지로 정리되었다.
첫 번째, 무조건 하루에 만보는 걷자. 오르막길이든 내리막길이든 중요하지 않다. 해발고도를 넘나들어서 온전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무조건 ‘걷기’로 승화시키자. 만보도 좋고 그 이상도 좋다. 그런데 만보 미만은 절대 안 된다. 그렇게 다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명찰을 달기 시작했다. 바로 ‘걷기 마니아’였다. 친구들은 나를 그렇게 불러주었다. 상당히 단순하지만 유치한 초등학생 별명보다는 더 멋있잖아?
두 번째, 미라클모닝을 실행하기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30분 동안 산책을 한다. 마곡에 위치한 우리 집 인근에는 마늬공원이라는 조그마한 산책로가 있다. 아침부터 사람들이 없는 썰렁한 한 겨울의 그 공원 위를 거닐면 마치 내가 혼자 이 세상을 정복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나름 내 인생을 한번 더 고귀하게 만들어준 녀석이 바로 산책이었다. 아 맞다. 이건 원칙 1인데 왜 2에 적었을까. 어차피 아침에 산책한다는 점이 제일 중요하잖아. 그러니까 여기에 넣어도 상관없을 듯하다.
세 번째, 나만의 일기를 3줄 이상 작성하기이다. 요즈음 아침부터 피곤한 나머지 소소한 일상의 시작점을 기록하지 않는 경우가 많더라. 일이 끝나거나 술을 마시고 결국 감성에 못 이겨 일기를 작성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꽤 한탄을 하곤 했다. 그렇게 할 거면 집어치우라는 내 마음속 감성의 소리가 나를 옭아맸다. 난 이 무의식의 감성을 하나하나 파헤치기 시작했다.
‘잠재적 감성’은 내 마음속 고유에 있는 녀석이고, ‘이성적 감성’은 그나마 사회생활할 때 필요한 가지각색 나의 페르소나였다.
전자는 술을 마시며, 감동적인 영화를 보거나, 혹은 산책로를 걷다 보면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런데 이 녀석은 절대 아침에 등장하면 안 되는 녀석이다. 그래서 무조건 이성적 감성을 앞 새운 채 오늘 하루의 일을 맞이하려고 노력했다. 참 쉽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의 감성이 묘한 혼합을 일으키면서 내가 굳건히 뭔가를 하도록 환경을 제공해주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참 고마운 나의 일상적인 감성들.
참 말이 길었다. 그러니까 결국에는 일기를 3줄 이상 작성할 때에는 아침에 작성하려고 노력 중이다. 그래야 ‘이성적 감성’이 선뜻 등장하여 나의 활기찬 하루를 올바르게 판단하도록 도와줄 것 아니냐.
결론적으로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은 오롯이 ‘나’이다. 내가 이런 것들을 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모든 부분은 스스로 우물 안에 가둬놓는 개구리에 불과할 뿐이다. 그래서 난 황소개구리가 되던가, 아니면 야생의 우두머리가 되든 결국에는 우물 밖으로 나오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쉽게 나왔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볼까. 적어도 저수지나 호수로 가지는 말자. 더 위험한 녀석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렇게 ‘나’라는 개구리는 적어도 ‘위험한 녀석들의 리그’에 껴들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말을 잘 안 듣는 청개구리라도 생태계 교란이 필수 불가결한, 갑을 관계 확실한 황소개구리의 밑으로 들어가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조용히 조심히 그저 평범한 일상에서 현생에 나를 바치기보다는, 나를 더 보여주고 싶었기에 가능한 표현이 아닐까. 스스로를 사랑하자. 사랑한다.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