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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Sep 13. 2023

오래된 귀에는 오래된 노래가 어울린다

흰샘의 '그냥 그런 이야기들'

가을이 시작되면서 새벽도 조금씩 늦게 온다.

집을 나설 때 빗방울이 듣기 시작했지만 우산을 꺼내기 귀찮아 그냥 걸었다.

어쩌다 얼굴이며 이마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이 오히려 시원했다. 가을비다.

열차가 서울을 벗어나자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안개비 속에 고구마를 캐는 늙은 부부의 모습이 그림처럼 잠시 나타났다가 세월처럼 빨리 지나갔다.

자욱한 안개비 너머로 보이는 들판은 정겹고도 쓸쓸하다.

벌써 벼 수확을 마친 논들이 보인다. 저 벼들을 다 수확하고 나면 들판은 더 쓸쓸해지리라. 쓸쓸해서 더 정겨워지리라.

오래된 귀에 오래된 이어폰을 꽂고 오래된 노래를 듣는다.

안개비가 하얗게 내리던 밤... 지금 빗속으로 걸어가는 나는 우산이 없어요...


왜 그녀의 이름은 하필 우순실인가? 꼭 그녀의 성은 雨일 것만 같고, 시옷이 거듭된 그녀의 이름도 우산을 떠올리게 하니 그녀와 그녀의 노래는 이미 정해진 운명 같은 것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다 깜박 졸았다.

안내 방송에 잠을 깨니 오송역이란다. 오송역을 지나자 제법 빗줄기가 굵어졌다.   

비에 젖어 검게 번들거리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 차들의 행렬이 보인다.

노란색과 초록색이 섞인 시골 버스가 앞장을 서고 그 뒤로 승용차며 트럭들이 줄을 섰다. 꼭 이른봄 냇가에서 어미 오리를 따라가는 새끼 오리들 같다.

버스에는 일찌감치 읍내 병원에 가는 할머니 두어 분과, 분교마저 없어져 읍내에 하나 남은 초등학교로 통학하는 아이들 서너 명이 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익산을 지나자 다행히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하늘은 잔뜩 찌푸렸다.

"우리 열차는 잠시 후 전주, 전주역에 도착합니다."

도착지가 정해져 있다는 것은 뭔지 모를 안도감을 준다. 내 삶의 끝도 그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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