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100번째 글
내일이 24절기 중에 22번째 절기인 동지(冬至)다. 어릴 적에는 어머니께서 팥죽을 쑤어 바람벽에도 뿌리고 정지(부엌)로 들어가는 바라지에도 뿌렸던 기억이 난다. 그게 모두 악귀를 막기 위한 일종의 주술이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미신이라고 치부해서는 안된다. 그만큼 간절하고 절박했던 데서 온 풍습일 터이다.
동지에 대한 기억은 팥죽 말고 이런 것도 있다. 오래전에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에 다니며 한문 공부를 했다. 사서삼경이 기본이었다. 주역을 배웠는데, 젊을 때라 그런지 어렵기만 했다. 그런데 주역을 강의하시는 선생님이 해 주신 말씀 가운데 딱 하나가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동짓날은 음기(陰氣)가 가장 강한 날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양기(陽氣)가 손상될 수 있으니 결혼한 남자들은 그날만큼은 혼자 자라는 말씀이었다. (그런가??)
너무도 유명한 조선 초기의 명기(名妓) 황진이의 생각은 달랐나 보다. 그녀는 긴 동짓달 밤이 사랑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시조 아니겠는가?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대학 다닐 때 국문학 수업을 듣는데, 교수님 왈, 이렇게 야한 시를 보신 적이 없단다. 특히 ‘어론님’을 풀이하시면서 ‘어른’의 어원이 본래 ‘어루다’에서 온 것이고, 그 말은 남녀가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라고 말씀하셨다. (도대체 왜 그런 것만 머릿속에 남겨두었느냐고 탓한다면, 나는 장금이처럼 대답할 밖에는 길이 없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오라 그런 것만 남아있는 것을 어찌한단 말입니까요...)
그러니 이 시조는 얼마나 기가 막히면서도 야한 발상인가 말이다. 밤 중에 가장 긴 동짓달 밤을 절반 잘라내어 잘 개어서 이불 속에 간직했다가 사랑하는 님이 오신 날 밤에 그것을 펴서 밤을 두 배로 늘려 즐기겠다는 심산 아닌가 말이다. ‘서리서리’나 ‘구비구비’ 같은 의태어를 나란히 놓아 대구를 맞춘 것도 보통의 솜씨를 훨씬 뛰어넘는다.
내가 좋아하는 팝송 가운데 짐 크로치(Jim Croce)의 ‘Time In A Bottle’이 있다.그 노래의 첫 구절은 황진이의 시조와 너무 닮아 있다.
If I could save time in a bottle... 내가 만일 시간을 병 속에 담아둘 수만 있다면 그걸 잘 간직했다가 그대와 함께 있을 때 그것을 꺼내어 쓰겠다는 내용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시간을 오래도록 함께 보내고 싶은 마음은 시공(時空)을 초월한 인간의 공통된 감정인가 보다. 아니면 짐 크로치가 어쩌다 황진이의 500년 전 시조를 보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