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필연적으로 사회적 동물이니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소통이 필요하다. 소통은 늘 곁에 있는 사람에 제한되지 않는다. 때로는 멀리 떨어진 사람과의 소통이 더욱 절실하다. 그런데 눈과 귀가 미치지 않을 만큼 멀리 있는 대상에게는 어떻게 소식을 주고받을 것인가? 그래서 출현한 것이 ‘편지’라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편지’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역사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오랜 편지의 역사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메일과 실시간 문자 메시지 같은 도구로 변화했을 뿐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더욱 발전한 것이라고 강변한다면 반론할 말은 없다.
요즘 누가 만년필에 잉크를 넣어서 종이에 편지를 쓰고, 겉봉투에 주소를 적고,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 넣고, 그것이 언제쯤 도착할 것인지, 그 사람이 그 편지를 받긴 받았는지, 답장은 언제 올 것인지 기다리는 일을 하겠는가? 이 바쁘고 분주하고 편리한 세상에서 누가 그런 구닥다리 원시적인 일을 하겠는가? 라고 한다면 또한 딱히 대답할 말은 없다.
다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가끔 그 구닥다리 편지가 쓰고 싶어지는 것이다. 특히 연말이 되면 수십 년 동안 해 온 버릇대로 연하장을 쓰고 싶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요즘은 연하장 구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아니, 사실은 쉬운데 몰랐다. 연하장을 사기 위해 11월부터 우체국에 몇 번이나 갔는데, 번번이 ‘없다’는 대답이었다. 언제쯤 들어오느냐니까 모르겠단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큰 우체국에 가 보라 했다. 혹시 헛걸음을 할지도 몰라 어렵사리 ‘큰 우체국’에 전화를 걸었는데, 이제 연하장은 우체국에서 취급하지 않는다고 했다. 찾는 사람들이 너무 적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 그렇다고 진작에 말해 주었다면 내가 몇 번이나 헛걸음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며, 이렇게 연하장을 구한 시간이 늦어지지도 않았을 터인데, 내가 자주 가는 그 우체국 직원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무려나 나는 연말이면 꼭 연하장을 사서 보내고 싶은 사람들에게 보낸다. 연하장이라는 것이 일정한 ‘유통 기한’이 있어서, 기한이 지나면 뜬금없이 보내기도 그렇고, 남으면 버리기도 아깝기에 보낼 곳을 미리 헤아려보고 거기에 맞추어 산다. 올해는 우체국에서 안내한 대로 인터넷 우체국에 주문을 했다. 그런데 주문을 한 지 1주일도 더 지나 배달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 날짜는 벌써 연말이 다가왔고, ‘덕분에’ 새해 첫날 즈음에야 배달될 명실상부한 연하장이 된 것이다.
해가 갈수록 보내는 연하장 수는 줄어든다. 물론 그중에는 세상을 떠나신 분도 계시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관계가 소원해져 더는 연하장을 보내기 망설여지는 사람들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망설이고 망설이다 보낼 때도 있다. 그것으로 인해 소원했던 관계가 다시 이어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 ‘관계’라는 것이 대답 없는 메아리 너머로 아득히 멀어지는 결과를 ‘검증’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내가 해마다 연하장을 보내는 대상은 대체로 정해져 있다. 老少를 떠나 스승으로 모시는 분들께는 반드시 연하장을 쓴다. 또한 가까운 벗들 몇 명과 문학 스승들께도 보낸다. 그리고 어머니. 작년에 ‘한 장이 남아서’ 어머니께 연하장을 썼는데, 그리 반가워하셨다. 그래서 올해도 보냈다. 초등학생 마냥 큰 글씨로, 초등학생 마냥 또박또박, 예쁘지는 않아도 잘 보이게 썼다.
이 연하장들을 받는 이들이 조금이나마 사람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함께 보내 본다. 아울러, 이 글을 읽는 이들께도 손으로 쓴 연하장은 아니지만 새해 인사를 전해 본다.
“브친님들, 갑진년 새해 몸과 마음 늘 평안하시고 즐거우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