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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Jan 08. 2024

흰샘의 漢詩 이야기

석양은 하염없이 아름다운데...

向晚意不適향만의부적 

저물녘 이내 마음 부칠 곳 없어

驅車登古原구거등고원

수레 몰고 옛 언덕 홀로 오르네

夕陽無限好석양무한호

석양은 하염없이 아름답지만

只是近黄昏지시근황혼

아쉬운 건 황혼이 다가오는 것


[번역: 흰샘]     


이상은 상

만당(晩唐) 때의 대표적인 시인 이상은(李商隱, 812~858)의 <등낙유원(登樂遊原)>이라는 작품이다. 이상은은 낭만적인 시풍을 구사한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또한 애처가로도 유명한데, 파촉 지방으로 나갔을 때 아내를 그리며 지은 시로 알려진 <야우기북(夜雨寄北)>은 제목부터 낭만적이다.(이 시는 차후에 기회를 보아 소개하고자 한다.)

이상은도 어린왕자나 나처럼 석양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저 아름다운 석양이 지고 나면 바로 황혼이 될 것이다. 절정 다음에 파국이 오는 것은 소설의 전개 방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아무려나 위의 시는 그가 만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시의 내용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기실 이상은은 50년도 살지 못했으니 만년이라 해야 요즘 나이로는 한창때이다. 예전에는 조로(早老)가 심하여 40만 넘어도 늙은 티를 냈다. 그러니 이 시를 두고 “이런 4가지 없는 녀석이 있나? 내가 너랑 띠동갑이지만 나는 아직도 팔팔한 청춘이다.” 하고 길길이 뛴다면, 이상은이 딱 한마디로 대답할 것이다. 개.꼰.대. 

 

연초부터 허리가 고장 나서 운동도 쉬고 집과 병원을 오가며 뒹굴다가 오늘 모처럼 동네 뒷산에 오른다. 때마침 산 너머에 남아있는 석양빛이 고층건물 유리창에 반사되어 불타는 듯 비치고, 숲속은 어느덧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 작은 숲에 며칠 전에 내린 잔설이 남아있고, 잘려나간 대나무숲이 보이고,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도 부목에 기대선 어린 이팝나무가 보였다. 그리고 빈산을 걷는 내 두 발이 번갈아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다. 

겨울산의 석양 속을 걸으며 나는 문득 엊그제 인터넷에서 본 뉴스가 떠올랐다. 한국 남성의 기대 수명이 평균 86.3세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내 나이는 잔설이 희끗희끗한 이 쓸쓸한 겨울산에서, 빛과 어둠이 자리를 바꾸려는 이 침침한 석양 속에서 어디쯤인가 가늠해 본다. 겨울산과 석양빛이 하나는 내 귀밑머리를 닮았고, 나머지 하나는 여전히 어정쩡한 내 마음을 닮았다고,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고심하며 답한다.

이럴 때는 문득 허공을 맴도는 곡비나 종구잡이의 구슬픈 노래 한 자락이 언뜻 서늘하게 가슴 한복판을 지나가는 듯도 한데, 언어로 바꾸려는 순간 그것들은 본래의 자리로 가뭇없이 사라져 버린다. 내가 시를 쓰지 않는(못하는) 변명거리를 하나 얻었으니, 오늘 산책은 이 정도로 성공이라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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