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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Jan 18. 2024

흰샘의 漢詩 이야기

눈길을 걷는 방법

野雪(야설) 들판의 눈길 처음 걸을 때      


穿雪野中去(천설야중거) 눈을 뚫고 들판 길 걸어갈 적에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제멋대로 걸어서는 안 될 일이지.

今朝我行跡(금조아행적) 오늘 아침 내가 내는 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마침내는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

[번역: 흰샘]     

유명한 시이다. 유명한 시인데, 작자를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시이다. 인터넷을 뒤져 보면 이 시가 서산대사 휴정의 시로 적혀 있는 것이 부지기수이다. 누군가 한번 그렇게 적으니까 무턱대고 확대 재생산을 해 쌓는다. 인터넷의 폐해이다. 어쩌면 글 좀 안다는 자가 맨 처음 올렸을 터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시는 서산대사의 시가 절대 아니다. 실제 서산대사의 문집인 ≪청허당집(淸虛堂集)≫에도 이 시는 실려 있지 않다.      

누군가의 서예작품에도 서산대사의 시라고...

그렇다면 이 시는 누구의 작품일까?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성리학자로 철종 때 호조참판을 지낸 임연(臨淵)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의 작품이다. 나는 이양연의 ≪임연당집(臨淵堂集)≫에서 이 시를 직접 확인했다. 

이양연의 ≪임연당집≫

이 시뿐 아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시나 명언들 가운데 작자가 잘못 알려진 것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특히 조선 후기에 좀 재미있고 독특한 발상을 가진 시는 모조리 작자가 ‘김삿갓’이다. 심지어 내가 학위논문을 쓴 강준흠의 작품도 김삿갓의 작품으로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었다.     

아무려나 오늘 소개한 시의 작자인 이양연은 평생 언행을 조심한 사람이고, 성리학을 깊이 공부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오죽하면 자신의 호를 임연(臨淵)이라고 지었을까? ‘임연’은 ≪시경≫에 나오는 “두려워하고 조심하기를 깊은 못가에 서 있듯이, 살얼음을 밟듯이 하라.[戰戰兢兢 如臨深淵 如履薄氷(전전긍긍 여림심연 여리박빙)]”는 말에서 ‘臨淵’을 잘라온 것이다. 이 시의 내용 또한 그의 그러한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내가 하는 행동이 뒷사람의 모델이 될 수 있으니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계하는 내용이다. 이 20자의 시 한 편에 그의 삶과 사상 전체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시가 가진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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