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샘의 그렇고 그런 얘기
오랜만에 관악산 중턱의 중턱까지 올랐다. 감기가 좀 나아진 듯하여 숲 바람을 쐬려고 관음사 쪽으로 걸어 올라가다가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오르게 된 것이었다. 며칠 전에 내린 눈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지만, 눈이 비로 바뀐 탓에 대부분 녹아서 산을 오르는 일이 어렵진 않았다. 게다가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별로 힘이 들지도 않고 숨이 차지도 않아 신기하다 생각하며 편하게 올랐다. 날이 맑아서 한강 너머 남산타워가 한층 가까웠고, 그 너머 북한산도 또렷이 보였다. 처음부터 목표를 정하지 않은 산행이었으니 아무 데서나 멈추면 그만이고, 멈춘 곳에서 되돌아오면 그만이었다.
계곡물은 표면에 얼음을 뒤집어썼지만 그 아래로는 여전히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잠시 물에 생각이 머물렀다. 공자는 물을 지혜의 상징으로 비유했고[知者樂水], 맹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이 마치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과 같다고 했다[人性之善也 猶水之就下也]. 노자는 최상의 선은 물[上善若水]이라 했다. 사람들은 모두 높은 곳에 처하기를 원하지만(사람뿐 아니다. 우리 집 고양이도 그러하다.) 물은 모두가 싫어하는 곳(가장 낮은 곳)에 처하기 때문에 道에 가깝다고 노자는 역설했다. 예수는 아예 ‘나는 생수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성인들은 모두 물에서 진리를 깨달은 듯하다. 나는 물에 대한 깊은 생각 따위가 따로 떠오르지 않았지만, 그런 분들의 말씀을 되새겨 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작은 새 몇 마리가 숲 사이를 날아다니기도 했다. 그 작은 것들이 이 황량한 숲에서 무엇을 먹으며, 어디서 잠을 자며 한겨울을 나는지 나는 알 길이 없었다. 다만 그것들이 살아 있다는 것이 새삼 경이로웠다. 바위에 몸을 반쯤 기댄 진달래 나무는 긴 겨울을 혼자 견디고 있었다. 미처 떨구지 못한 마른 잎 몇을 아직도 달고, 가지마다 목을 길게 늘여 빼고 있었다. 모두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봄을 기다린 일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배부르고 등 따스우니 봄이 간절하지 않은 게다. 그러나 저 새와 진달래를 위해서라도 봄을 함께 기다려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봄이 오면 다시 만나자고, 새와, 진달래와, 계곡물과 인사를 나누고 나는 다시 사람의 마을로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