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의 문제
오랜만에 강릉 오죽헌에 가서 율곡을 모신 사당인 <문성사(文成祠)>부터 시작하여, 신사임당이 용꿈을 꾸고 율곡을 낳았다는 <몽룡실(夢龍室)>이며, 세종 때 율곡의 선조가 심었는데 율곡이 끔찍이 사랑했다는 율곡매(栗谷梅)등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문성사 현판 글씨는 (외람되지만) 참 천박해 보였다.
사랑채를 지나 ‘운한문(雲漢門)’을 통과하면 나타나는 작은 각(閣)이 바로 정조의 어필(御筆)이 소장된 ‘어제각(御製閣)’이다. 그곳에 정조가 직접 지어[御製-어제] 직접 쓴[御筆-어필] 글이 씌어 있는 벼루가 보관되어 있다.(5천원 짜리 지폐에도 이 벼루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벼루 뒷면에 쓰인 글(한문 문체로는 銘(명)이다.)에 대한 풀이가 아무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 글의 전문은 이러하다. [독음은 필자가 붙임]
<0>
涵婺池(함무지)
象孔石(상공석)
普厥施(보궐시)
龍歸洞(용귀동)
雲潑墨(운발묵)
文在玆(문재자)
거기에는 이렇게 풀이가 되어 있다.
<1>
涵婺池 무원 주자의 못에 적셔 내어
象孔石 공자의 도를 본받아
普厥施 널리 베풂이여.
龍歸洞 율곡은 동천으로 돌아갔건만
雲潑墨 구름은 먹에 뿌려
文在玆 학문은 여기 남아 있구려.
도대체 해석이 아리송하다. 나 같은 전공자는 대충 의미가 통하지만, 그곳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국어를 읽고도 한국어를 이해할 수 없는 자괴감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혹시나 하여 가장 공신력 있다고 믿어지는 <한국고전번역원>에 들어가 보니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다.
<2>
涵婺池 배여 있는 것이 무지인가
象孔石 닮은 모습이 공석인가
普厥施 그 용도는 넓으니
龍歸洞 흑룡이 계곡으로 돌아가는가
雲潑墨 구름이 먹을 뿌리니
文在玆 문자가 여기에 있다
정말이지 ‘무지’한 중생으로서는 이해가 ‘공석’이 되고 만다. 한문 전문가라는 분이 번역한 이 글도 글자 그대로 풀이를 해 놓았을 뿐 이해 불가다. (나는 이 번역을 하신 분은 스스로 이 글의 뜻이 이해가 되는지 진정으로 궁금하다.) 게다가 銘이라는 문체는 대부분 운문(韻文)으로 지어진다. 한시와 비슷하게 일정한 부분에 압운을 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보자면 위의 글은 분명 ‘3-3’ 구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3구의 말자인 施와 제6구의 말자인 玆는 정확히 같은 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을 ‘2-2-2’ 구조로 본 것부터가 오류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차라리 <1>번은 명의 형식에 맞추어 번역을 한 셈이다.
이 글은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에도 나오고, 율곡의 문집인 <율곡전서>에도 나온다. <홍재전서>에는 ‘栗谷硏銘’이라는 제목으로 나온다. ‘율곡의 벼루에 쓴 명’이라는 말이다. [硏은 硯과 통용된다 - 필자 주] 명색이 한문을 전공했다는 내가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이렇게 풀어 본다.
<3>
涵婺池 주자의 연지(硯池)에 붓을 적시고
象孔石 공자의 벼룻돌을 본받아
普厥施 그 학문을 널리 베풀었도다.
龍歸洞 용은 골짜기로 돌아갔으나
雲潑墨 구름을 부려 먹물을 뿌린 듯
文在玆 글은 여태 여기에 남아 있도다.
이 글의 대상이 율곡의 벼루이므로 1, 2구에서는 벼루에 대하여 노래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3구는 그 벼루의 효용을 말한 것이다. 후반 3구절은, 율곡은 죽었지만 그의 글은 바로 이 벼루 덕분에 여기에 남아 있다고 노래한 것이다.
내가 감히 저명한 학자들의 번역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번역이란 원문의 형식과 내용에 충실해야 하며, 누구나 읽어도 이해가 될 수 있는 말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나의 번역을 읽고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나의 비판이 고스란히 부메랑이 되어 내 가슴팍에 꽂힐 것을 각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