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샘 Jan 25. 2024

雪國이었다

친한 후배들과 강원도 여행계획을 세웠는데, 폭설이 내린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잠깐 고민했지만 일단 떠나기로 했다. 물론 목숨 걸고 여행할 일은 없으니, 가다가 눈에 막히면 바로 되돌아와 어디 주막에서 술이나 마시자는 생각이었다. 약간 흐리기는 했지만, 날씨는 적당히 춥고 적당히 깨끗하여 겨울 여행을 하기엔 맞춤하였다.

이런 만화 주인공 4명이 함께한 여행이었다^^

일요일인 데다 눈 소식이 있어서인지 춘천-양양 고속도로는 한가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차가 태백산맥을 관통하는 터널을 빠져나가는 순간 눈 앞에 펼쳐지는 모습에 우리는 아이들처럼 탄성을 질렀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첫머리처럼,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내게는 큰 감동이 없었던 그 소설이 노벨상을 탄 데에는 첫 문장이 한몫을 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아무려나, 태백산맥 동쪽의 설경은 절경이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는 눈에 덮인 설악산의 모습이었다. 왜 그 산의 이름이 雪嶽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속초에서 점심을 먹고 고성으로 올라갔다. 눈은 연신 내렸지만, 기온이 높아 길에는 쌓이지 않았다. 고성 왕곡마을은 영화 <동주>의 촬영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주차장은 흰 눈을 뒤집어쓴 채 텅 비어 있었다. 동네에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우리는 우산을 하나씩 받쳐 들고 뽀드득뽀드득 소리가 나는 눈을 밟으며 함씨 가옥, 김씨 가옥, 최씨 가옥들을 두루 둘러보았다. 영화 속 동주가 머물던 집, 눈 덮인 평상에도 앉아 보았다. 그렇게 눈을 맞으며, 눈을 밟으며 오래된 시골 마을을 걸어볼 기회가 흔치는 않을 것이므로, 우리는 가능한 한 말을 삼가고 눈과 귀와 촉감을 자연을 향해 열었다.     

영화 <동주>의 집 마당
왕곡마을 전경

숙소가 있는 양양으로 가는 길에 속초에 다시 들렀다. 속초는 젊은 시절, 영동고속도로가 왕복 2차선일 때부터 동부고속 버스를 타고 놀러 다니던 곳이다. 최근에는 하도 바가지가 심해 정나미가 떨어지긴 했어도, 상술이 추억을 막을 수는 없었다. 속초 대포항에 가면 내가 늘 찾는, 절대 바가지 씌우지 않는 단골 횟집이 있다. 10만 원어치 회를 샀는데, 남자 네 명이 다 못 먹고 남겼다. 회 좋아하는 부산 사나이 원교수가 동행하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대포항오래된 단골집
10만 원짜리 회

적당한 피로와 적당한 알콜에 취해 자는 잠은 달았다. 반투명 커튼 사이로 아침이 왔다. 동해에서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지는 못했지만, 구름을 붉게 물들이며 내 생애 유일한 아침의 유일한 해가 변함없이 제 일을 하고 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선생이 끓인 해장 라면과 사과 한 쪽으로 아침을 간단히 해결하고 1층에 있는 카페에서 갓 구운 빵과 갓 내린 커피로 아침 식사의 마침표를 찍었다.     

동해는 아름다웠지만 바람은 무서웠다

어제는 내리는 눈이 바로 녹을 만큼 따스하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바람이 사나웠다. 동해 바다는 한없이 푸르렀지만, 파도는 삼킬 듯 사나웠다. 하조대 전망대 아래 나무 데크까지 파도가 올라왔다. 파도가 몰고 온 칼바람이 꽁꽁 싸맨 얼굴 빈틈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우리는 서둘러 차 안으로 대피해야 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의 두 번째 목적지, 강릉으로 향했다.      

멀리 보이는 설악은 현실 세계가 아닌 것만 같았다

점심은 강릉불고기 본점에서 먹었다. 인심이 푸짐했던 그곳도 많이 변한 듯했지만, 파를 산더미처럼 얹어서 구워 먹는 불고기 맛은 여전했다. 강릉까지 가서 불고기만 먹고 오는 건 예의가 아니라는 의견에 따라 찾아간 곳은 오죽헌이었다. 너무 뻔한 것 아니냐고? 원래 인생이 뻔한 거고, 뻔한 것이 대체로 진리에 가깝다. 오죽헌의 상징은 신사임당도 율곡도 아니다. 당연히 오죽(烏竹)이다. 오죽헌에 갈 때마다 나는 늘 오죽이 탐난다. 저 오죽 몇 포기 시골집 뒤꼍에 심어 두고, 한여름 대바람 소리와 한겨울 눈[雪]에 눌려 능청거리는 모습을 듣고 보고 싶다. 그런 상상이나 하다가, 율곡이 무척이나 아꼈다는 율곡매(栗谷梅)의 남은 가지가 남쪽을 향해서만 뻗은 것을 보다가, 봄은 초목들의 간절함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문성사(文成祠)’ 글씨는 아무리 보아도 너무 천박하다고 생각하다가,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생각들을 쉼 없이 하고 있나 또 생각하는 것이었다...

봄은 남쪽으로만 향한 오래된 나무의 간절함으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작가의 이전글 한국인도 이해하지 못하는 한국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