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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Mar 01. 2024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쪼잔함

흰샘의 그냥 그런 이야기

속옷 하나와 점심으로 먹을 고기 한 팩을 사러 갔다. 늘 가는 곳인지라, 나는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단 한 번 망설일 것도, 생각할 것도 없이 직진하면 그만이었다. 굳이 바구니나 쇼핑 카트도 필요 없었다. 

연휴 첫날의 마트는 명절 직전처럼 붐볐다. 매대마다 사람들이 가득했는데, 무엇보다 계산대 앞마다 길게 늘어선 줄은 놀이공원 못지않았다. 나는 장사진을 친 계산대 앞을 지나쳐 소량 전용 계산대 앞으로 갔다. 소형 계산대는 자신이 알아서 물건을 찍고 결제를 하는 곳인데, 분명 ‘5개 이하만 가능’이라고 큼지막하게 써 붙여 놓았다. 계산대가 4개나 있으니 내 앞에 줄을 선 사람이 20명 정도가 된다 해도 10분이면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소량이 아닌데도 붐비는 계산대를 피해 이곳으로 온다. 그러니 자꾸만 늦어진다.

물건 2개를 계산하기 위해 20분을 기다렸다

웬만하면 봐주려 했다. 그런데 한 젊은 여인이 물건을 쇼핑카트에 거의 가득 실었다. 제한 개수인 5개의 10배는 되어 보였다. 그녀는 계산대 하나를 차지하고 서서 어머어마한 물건들을 하나씩 찍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직원을 부르고, 직원이 와서 카드를 찍고는 모두 취소한 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나는 고작 물건 2개를 계산하기 위해 20분 동안이나 줄을 서서 30초도 안 되어 계산을 마쳤다. 그 여자는 심지어 내가 계산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도 여전히 ‘계산중’이었다. 화를 참지 못해 공연히 앞에 앉아있는 직원에게 한마디 했다. 사실은 모두가 들으라고 큰소리로 말했다. “이게 뭐하는 겁니까? 여기 소량 계산대 아닌가요? 해도 너무하네...” 직원이 쩔쩔매며 오늘 사람이 너무 많아서 미처 통제를 할 수 없었노라고 변명을 한다. 여전히 ‘계산중’인 그 여인이 나를 슬쩍 쳐다본다. 미안한 기색도 아니고, ‘웬 꼰대야?’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생각 같아서는 한 번 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그녀는 여전히 계산중이었다

나오면서 생각하니 두고두고 분이 안 풀린다. 분노는 이제 나를 향해 있었다. ‘그거 좀 봐 주지 쪼잔하게 꼭 지적질을 해야 했냐?’ 하는 자성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삼일절이 아닌가? 순국선열들은 나라를 위하여, 대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건만, 나는 겨우 이따위 일에 분노하고 있는가? 엊그제 읽은 <맹자>에도 큰 분노를 가져야 천하가 돌아온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 참을 수 없는 내 존재의 쪼잔함이여...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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