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샘 Nov 06.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

02. '떼르미니'와 '뽀꼬살레'

  13시간 반 만에 로마에 도착하자 여행사에서 나온 가이드처럼 딸내미가 휴대폰에 환영 문자를 찍어 올리고 우리를 반겼다. 지금부터 열흘 동안 모든 여행 일정은 온전히 딸내미의 손에 달려있다. 하긴 비행기 표 예약부터 숙소 예약, 주요 관광지의 입장권 예약, 식당 예약까지 모든 것이 딸내미의 몫이었다. 내일 아침 시칠리아로 바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딸내미는 공항에 한 번에 갈 수 있는 곳으로 숙소를 정해 놓았다. 

  공항에서 직통으로 가는 역의 이름이 떼르미니(Termini)였다. 나는 그 역이 로마의 서울역 같은 곳이라는 딸의 설명을 들으며 아마도 터미널(terminal)과 관계있으리라 짐작했다. 떼르미니는 로마에 딱 두 개 노선뿐인 지하철의 환승역일 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는 물론, 프랑스의 파리나 독일의 뮌헨 등지로 가는 열차도 출발하는 역이니, 기점이자 종점인 ‘터미널’과 관련 있는 이름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아보니 떼르미니는 목욕탕이나 샘을 뜻하는 라틴어 ‘떼르미(terme)’에서 나온 이름이라 했다. 고대 로마시대에 목욕탕이 있던 자리에 세운 역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아무려나 떼르미니는 모든 열차와 버스가 출발하거나 거쳐 가는 역으로, 우리의 서울역과 매우 비슷한 위상과 역할을 갖는 곳이었다. 로마 공항에서 떼르미니로 가는 동안에도 곳곳에 버려진 듯 서 있는 유적들을 볼 수 있었으니, 이탈리아는 전역이 유적 아닌 곳이 없다는 말이 실감났다. 


  떼르미니역 은 복잡하고 시끄럽고 더러웠다. 너무나 많은 교통편이 모이는 곳이라 복잡하였고, 각지에서 온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로 시끄러웠으며, 쓰레기가 여기저기 나뒹굴고 벽에는 온통 낙서로 지저분했다. 떼르미니 역은 ‘옛날 서울역’에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커다란 여행 가방을 하나씩 끌고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10분 정도 걸어 숙소에 도착했다. 아주 오래된 건물의 2층에 있는 원룸이 우리의 첫 번째 숙소였다. 대충 짐을 정리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역 근처 식당이었는데 다행히 빈자리가 있었다. 음식은 이미 이탈리아 생활에 익숙해진 딸내미가 능숙하게 주인 할배와 눈을 맞춘 뒤 3가지를 시켰다. 파스타 하나와 해물 튀김 하나, 그리고 ‘뇨끼’라는 생면부지의 음식이었다. 딸내미가 음식을 시키면서 ‘뽀꼬살레’라고 말하자 주인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 살레?” 처음 듣는 말에 내가 묻자 딸내미가 말한다. “이탈리아 음식이 대체로 우리 입맛에는 많이 짜. 그래서 덜 짜게, 소금을 조금만 넣어 달라고 하는 말이 이탈리아 말로 ‘뽀꼬살레’야. 엄마, 아빠도 외워 둬야 해.” 배도 고팠거니와 음식은 맛있었다. 다만 뇨끼는 씹는 질감이 감자도 아닌 것이 밀가루도 아닌 것이 요상하긴 했다. ‘뽀꼬살레’ 덕분에 간도 적당히 맞았다. 그 뒤에도 ‘뽀꼬살레’는 여러 번 써먹었는데, 몇 번은 잊어버리고 주문해서 너무 짠 음식을 먹어야 했다.


  저녁을 먹고 딸내미의 제안에 따라 콜로세움 야경을 보러 갔다. 걸어서 멀지 않은 곳이라 했지만 그건 이미 1주일간 이탈리아에 적응한 데다 워낙 강철체력인 딸내미의 입장이었고, 우리 부부에게는 멀었다. 13시간 반을 날아왔고, 새벽에 일어나 그 시간까지 20시간 정도를 깨어있는 상태였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다행히 나는 비행기 안에서 일찌감치 몇 시간 자 둔 덕분에 시차에 바로 적응이 된 것 같았다. 콜로세움은 7년 전에 로마에 왔을 때 보았지만, 하필 그땐 한창 공사 중이라 내부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야경도 보지 못했는데, 오늘 비로소 아름다운 콜로세움의 야경을 보게 된 것이다. 평일이라서인지 사람들도 거의 없어 더욱 좋았다. 그렇게 콜로세움과 개선문을 한 바퀴 돌고 나자 아내는 도저히 다시 걸어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는단다. 택시를 탔는데, 걸어서 20분 거리에 택시비 3만 원! 그때 이후로 택시는 다시 타지 않았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본조르노, 시칠리아 - 0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