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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Nov 06.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 - 03

03. 라이언(Ryan)일병 죽이기

1부.

  로마 떼르미니 역 근처의 여인숙(도로에 붙어 있어 밤새 차들의 빵빵대는 소리와 오토바이의 굉음이 고스란히 들리는 게 영락없는 옛날 서울역 뒷골목 여인숙이었다)에서 하룻밤 묵고 드디어 시칠리아로 가는 날이다. 우리가 타고 갈 비행기는 라이언(Ryan) 항공이었다. 주로 이탈리아 국내와 가까운 이웃 나라를 오가는 항공사로, 우리나라의 진에어 정도라고 보면 된다. 나는 철자는 다르지만 사자의 lion과 발음이 같아 외우기 쉬운 그 항공사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재미있게 보았던 ‘라이언일병구하기’ 영화도 생각났다. 물론 표는 딸내미가 버얼써 예매를 해둔지라 우리는 짐만 실어 보내고 바코드 한번만 찍으면 그만이었다.


  우리나라 김포공항 생각하고 1시간 전에 가면 되겠지, 늑장을 부린 게 사달의 시작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짐을 부치고 남는 시간에 아침을 뭘 먹을까 고민할 정도로 태평하고 행복하기까지 했다. 공항버스를 타기 전까지는. 열차를 탈 것을, 하필 역 입구에서 공항행 버스가 우리를 유혹한 것이, 한 5분 걷기 싫어 그 유혹에 넘어간 것이 문제였다.

  좁디좁은 구 서울역 골목을 돌고 돌고 또 돌고 돌아 나간 버스는 숭례문 앞을 간신히 빠져나가더니 시청 앞 네거리에서 출근길 자동차 행렬에 발목이 잡혀 버렸다.(영락없이 우리네 7,80년대 모습이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던 버스가 겨우 시내를 빠져나와 공항로로 접어들 즈음 이미 도착예정 시간은 지나고 있었다. 결국 45분 걸린다는 길을 한 시간 걸려 공항에 도착했는데, ‘라이언일병’이 안 보인다. 이 길이 아닌개벼. 여긴 국제선이고, 국내선은 공항을 다시 나가서 왼쪽으로 돈 다음 졸~라 걸어가면 나온다고, 이태리 공항 여직원이 특유의 때때거리는 이태리식 영어 발음으로 말하는 것이 얼핏 들렸다. 그때부터 주말이면 단독군장을 하고 관악산 정상을 왕복 3시간에 주파하는 딸내미의 강철체력이 빛을 발한다. 우리는 그 큰 트렁크를 하나씩 끌고 딸내미를 쫓아가느라 불평할 겨를도 없다. 그렇게 철인 3종경기에서나 볼 만한 질주 끝에 국내선에 도착했는데, 오 마이 삼신할매 건진법사 천공스님...


  공항은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우여곡절 끝에 라이언항공을 찾긴 찾았는데 줄은 100m, 사람은 200명에 창구는 두 개만 열려 있었다. 7~8개의 창구에 직원이 분명 앉아있는데도 오직 두 개만 연 것이다. 한 시간 뒤에 출발하는 표를 보여주었지만 직원은 나 알 바 아니라는 듯 무조건 줄을 서라는 것이었다. 도리 없이 줄을 섰는데 20분 동안 5m 전진이다. 짐을 시간 안에 부치는 건 불가능. 창구에는 심지어 여러 사자들(라이언의 직원들)이 앉아 있었지만 문이 열린 사자굴(라이언의 창구)은 오직 두 개 뿐, 사람들이 아우성을 쳐도 절대로 더 열어주지 않았다. 딸내미는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수습을 해보려 했지만 미련 곰탱이 같은 사자xx(xx는 대통령께 배운 욕임. 심지어 그분은 욕이 아니라 하심)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딸내미가 사정사정해서 겨우 불 꺼진 한 창구에서 상담을 했는데, 한참 이야기를 하던 그 직원은 갑자기 이야기를 끊고 가방을 챙겨 나가면서 말했다. “나는 근무시간이 끝났고, 10분 뒤에 후임자가 오니까 그와 이야기하라.” 우리와 같은 처지의 이탈리아 아줌마가 있었다. 그 여직원 뒤통수에 대고 마구 퍼붓는 말이 이탈리아 욕이라는 건 표정과 말투만으로도 직감할 수 있었다. 나도 속으로 ‘이 나쁜 xx들’이라고 욕을 퍼부었지만 정신승리에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짐을 부치지 못하면 비행기를 탈 수가 없다. 한때 ‘차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광고가 있었거니와 ‘사람보다 짐짝이 먼저’라는 놀라운 진리를 깨우치는 순간이었다. 모든 깨달음에는 고통이 수반되듯이 우리에게도 고통이 찾아왔다. 힘들게 예매한 비행기를 놓치고 만 것이다. 딸내미는 나중에 온 직원에게 처음부터 다시 설명을 한다. 그 직원의 답은 간단명료했다. 이미 이번 비행기는 글렀고, 한 시간 반 뒤에 가는 비행기가 있으니 그걸로 바꾸려면 300유로를 내란다. 그래, 돈으로 해결하는 게 가장 쉽고 깔끔하지. 까짓 것 내자. 그랬더니 굳게 닫혀있던 사자굴 하나가 열리면서 우리를 오라고 손짓한다. 심지어 그 사자는 온화한 미소까지 띠고 있다. 나와 딸내미는 당당히 짐짝을 모시고 사자굴 앞으로 갔다. 심지어 나는 보안요원만 여닫을 수 있는 ‘금줄’을 스스로 열고, 그 동안에 겨우 10m 전진해 있던 아내를 구출한 다음 다시 금줄을 쳤다. 길게 줄을 서 있던 수많은 군중들의 눈이 일제히 우리에게 쏠렸다. ‘누구냐? 넌...’ 이라고 외치는 무언의 함성을 들으며 우리는 VIP 사자굴에서 표를 끊고 짐짝을 모셨다. 돈은 사자도 춤추게 한다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이다.

  딸내미는 울상이었고, 나는 “아빠는 돈이 많으니 걱정 말라.”고 위로하면서 속으론 열심히 지갑 속에 남은 유로화를 계산하고 있었다. 아무려나 오늘 갈 수 있음에, 저녁 아니고 겨우 두 시간 뒤에 갈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은 했지만, 이놈의 라이언일병을 한 대 패고 싶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우리 같은 어수룩한 외국인에게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래도 아직 죽이고 싶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빵과 커피로 느긋하고 달콤한 아점을 즐겼으니까...     

2부.

  우리가 거액을 내고 바꾼 시칠리아 카타니아 행 비행기 표는 11시 45분발이었다.(시칠리아에는 세 개의 공항이 있다. 수도인 북서부 꼭대기 팔레르모와 그 아래 서부의 트라파니, 그리고 우리가 가고자 하는 동부의 카타니아가 그것이다.) 우리는 짐도 부쳤겠다, 아점도 먹었겠다, 급할 것이 없었다. 아내는 그 와중에 유튜브를 통해 이준호 콘서트에 빠져들었고, 나는 여행기를 끼적이고, 딸내미는 다음 일정을 열심히 짜고 있었다. 


  느긋한 마음으로 11시 10분에 줄을 섰다. 그런데 이번에는 탑승구 문이 열리지 않는다. 결국 출발시각이 지나도록 탑승구가 열리지 않자 혈기왕성한 이탈리아 할배 한 분과 할매 한 분이 번갈아가며 직원에게 항의를 했다. 특히 그 할매, 단 한 번의 고함으로 어린 손녀의 징징거림을 잠재워 버린 카리스마 넘치는 할매였다. 그러나 라이언일병은 들은 체도 안 했다. 이미 11:45분은 버얼써 물 건너갔다. 그제야 모니터에 12:20으로 시간이 변경되었다는 자막이 뜬다.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더니 자리를 이동한다. 이건 또 뭐지? 탑승구도 바뀌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들을 놓칠세라 또 열심히 따라간다. 가서는 또 줄을 섰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또 움직인다. 탑승구는 또 바뀌고 출발 시간은 또 다시 13:00로 연기되었다. 이쯤 되면 화가 안 날 재간이 없다. 나는 분기탱천하여 이놈의 라이언일병을 패 죽이고 싶다는 과격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야, 이 댕댕이 xx들아!’라고 마구 쏘아대고 싶었지만, 국격을 ‘날리믄’ ‘쪽팔릴’ 것 같아 꾹꾹 참아야 했다. 결국 세 번이나 탑승구를 바꾼 라이언일병은 원래 출발 예정 시간을 2시간 가까이나 넘긴 1시 반이 되어서야 출발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사태를 겪는 동안 라이언항공은 단 한 마디의 사과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혹시라도 이탈리아에 가서 라이언 항공을 이용하실 분이 있다면 마음을 단디 먹기 바란다. 안 그러면 이국에서 본의 아니게 국격을 날리는 쪽팔린 일을 겪거나, 심하면 마음으로나마 살생을 하는 죄를 짓게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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