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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Nov 11.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05. 저 언덕에 가고 싶다

카타니아 공항에서 렌터카 안토니오를 타고 우리의 시칠리아 첫 번째 숙소이자 여행지인 ‘타오르미나’로 향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는 길에 보는 풍경들은 낯설고 신기했다. 높은 언덕 꼭대기에 마을이 형성된 모습은 유럽의 대부분 나라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기는 했지만, 시칠리아는 유난히 그러했다. 그렇게 50분 정도를 달려갔다. 저만치 앞에 보이는 도시가 타오르미나라고 했다. 이름이 잘 외워지지 않을 때는 유치한 방법을 동원하는 것이 제일이다. 나는 여전히 ‘타오르는’ 에트나 화산 가까이 있는 그 도시 이름을 금세 외웠다.


딸내미가 예약했다는 숙소는 산 중턱에 있었다. 큰길(이라 해 보아야 왕복 2차선, 편도 1차선이다)에서 시골길로 접어들었는데, 좁고 울퉁불퉁하고 언덕지고 기본이 180도 정도로 꺾이는 산길을 돌고 돌며 올라갔다. 나는 이 길이 정말 맞느냐고 몇 번이나 확인을 했다. 도무지 동네가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산속에 있는 외딴집을 예약한 건 아닐까 하는 불안과 기대가 동시에 밀려오기도 했다. 그런데 그 이상한 길을 꾸역꾸역 올라가니 거짓말처럼 동네가 나왔다. 그리고 건너편 동네 꼭대기에 형성된 마을인지 도시인지는 마치 천상에 떠 있는 것처럼 높고도 아름다웠다. 나는 ‘저 언덕에 가고 싶다’고 중얼거렸는데, 아내는 이 시간에 저길 어떻게 가느냐고 타박을 한다. 


숙소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에어비앤비 숙소였는데, 딸내미는 한국어는 물론 영어도 전혀 하지 못하는 안주인과 번역기를 이용해서 아무 문제없이 대화를 했다. 우리는 안주인이 설명해 준 대로 다시 안토니오를 몰고 언덕길을 내려가 건너편 언덕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유명 관광지라서인지 그 좁고 굽이진 길에 차들이 많이 오갔다. 안주인이 알려준 대로 ‘포르테 카타니아’ 주차장에 차를 세운 다음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까지 올라갔다. 7층에 내리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바로 타오르미나 고대도시였다. 내가 가고 싶어 한 ‘저 언덕’이 바로 그곳이었다. 아내의 타박을 받은 지 불과 10분 만에 나는 그 언덕 위에 올라가 있었다. 눈앞에는 지중해가 펼쳐지고 오른쪽에는 에트나 화산이 여전히 연기를 뿜고 있다. 그 너머로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노을 너머로는 또 ‘당신의 눈썹 같은 초생달’(하덕규_<새벽>)이 올라왔다. 모든 것이 환영(幻影)인 것만 같았다. 홀린 듯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우리는 거리로 접어들었다. 고대 그리스 때부터 만들어졌다는 타오르미나는 이후에 로마를 거치고 또 여러 번 주인이 바뀐 끝에 현재가 된, 시칠리아 대부분의 도시와 비슷한 운명과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타오르미나의 석양

거리는 관광객들로 넘쳤지만, 간간이 개를 끌고 산책을 하는 동네 사람들이며, 광장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 함께 뛰는 강아지들, 그리고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어우러진 곳이었다. 광장 한복판에는 로마 때부터 있었다는 수도에서 아직도 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녁을 먹어야 했다. 이탈리아 식당은 보통 리스토란테, 트라토리아, 오스테리아 등 세 종류가 있다. 그밖에도 피자만 파는 피제리아가 있다. 리스토란테는 이를테면 좀 고급스럽고 비싼 레스토랑이고, 트라토리아는 그 지역에서 제법 오래된 전통 식당 같은 곳이며, 오스테리아는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식당이다. 우리 식으로 하자면 차례로 고급 한정식집, 갈비 등이 나오는 한식집, 보통 백반집이나 분식점 정도 될 것이다. 우리는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오스테리아를 골라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세 명이 실컷 먹고 와인 한 병을 마셨는데도 우리 돈 10만원이 채 안 나왔다.


우리가 묵는 숙소에 고양이들이 여러 마리 있었다. 모두 주인인 노부부가 돌보는 놈들이었다. 그중에 유난히 붙임성이 좋은 아기 고양이가 있었다. 주인에게 이름을 물어보니 로젤라라고 했다. 여자 아이 이름이다. 고양이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 딸내미가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놀아주기도 했다. 그랬더니 그놈이 아예 우리 숙소 현관문 앞에 자리를 잡고 떠나질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문을 여니 로젤라가 앉아 있다. 밤새 그러고 있었는지 날이 밝자마자 쫓아왔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붙임성의 끝판왕이었다. 아마도 그 고양이의 MBTI는 ESTJ나 ESFJ일 것만 같았다. 


이른 아침 문을 열자 로젤라가 앉아 있었다.

아침 식사는 숙소의 안주인이 차려주었다. 시칠리아 식으로 차린 진수성찬이었다. 앞에는 지중해, 왼쪽은 타오르미나, 오른쪽엔 에트나 화산이 보이는 뜰에서 우리는 로마황제처럼 아침식사를 즐겼다.


타오르미나의 아침

타오르미나를 떠나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었다. 그곳은 어제 시간이 늦어서 보지 못한 고대 그리스의 원형극장이었다. 언덕을 올라가니 놀랍게도 언덕 끝에 (매표소가 있었다. 아니 아니,) 축구장만 한 거대한 돌 건축물이 나타났다.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2천 5백여 년 전에 만들어진 극장이다. 지중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그 오른쪽으로는 화산이 불과 연기를 내뿜는 그 언덕에서 밤에 불을 밝히고 그들은 시와 음악과 연극을 즐겼다 한다. 그보다는 좀 뒤에 지어졌겠지만 중국 한나라 때 지어진 고시 중에 ‘晝短苦夜長(주단고야장), 何不秉燭遊(하불병촉유)’라는 구절이 있다. 낮은 짧고 괴로운 밤은 길기만 하니, 어찌 촛불을 잡고 놀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뜻이다. 아마 그들도 그런 마음으로 밤드리 놀았을 것이다. 그 극장에서는 지금도 여러 가지 공연이 펼쳐진다고 한다. 기회가 맞는다면, 좀 더 시간이 허락된다면, 안도현의 시처럼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는’(안도현_<바닷가우체국>) 지중해의 하늘 아래 첫 번째 도시, 타오르미나의 고대 극장에서 펼쳐지는 공연에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게 이곳을 서성거리다 보면 낡아빠진 옷을 걸치고, 맨발이지만 놀랄만큼 크고 예쁜 눈을 가진 열 두살 소녀(미하일엔데_<모모>)를 만날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타오르미나를 떠나 이번 시칠리아 여행 중 가장 오래 머물게 될 시라쿠사로 출발한다.

모모가 살지도 모르는 타오르미나 원형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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