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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Nov 13.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07. 아재(혹은 할배) 누군교?

시라쿠사 시내로 접어들자 나는 왜 이곳에 ‘안토니오’ 같은 작은 경차만 있는지 바로 실감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골목길은 대부분 중세 때 만든 마찻길을 그대로 쓴다고 한다. 그러니 길이라는 것이 마차가 한 대 지나고 사람이 그 곁으로 한 명 지날 정도의 너비이다. 그나마 좀 넓은 차도는 양쪽에 차들이 빽빽이 주차되어 있다. 그 사이를 곡예하듯 빠져나가야 한다. 신기한 것은 도로에 따라 2중, 3중 제멋대로 주차를 했지만 반드시 소형차 한 대는 지나갈 수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좁디좁은 길을 이탈리아의 차들은 쌩쌩 잘도 빠져나갔지만 나는 아직 적응이 필요했다. 비록 가장 비싼 보험을 들기는 했지만 이국에서 교통사고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시라쿠사에서 우리가 묵은 숙소는 이탈리아 특유의 건축양식에 따라 길옆으로 수십 미터에 걸쳐 지어진 거대한 건물 가운데 23호 집이었다. 그러나 오래되고 높은 계단을 올라가 2층에 있는 방은 깨끗하게 수리된 복층이었다. 언뜻 보면 천장이 높고 나무로 대들보와 서까래를 한 우리네 한옥 내부와 비슷했다. 다만 통건물 한가운데 있는 집이라 밖으로 통하는 창문이 없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시라쿠사의 핵심인 오르티지아 섬으로 건너갔다. 두 개의 다리로 본섬과 연결된 작은 섬 오르티지아는, 그러나 본섬보다 훨씬 먼저 문명이 발달했고, 섬 전체가 문화재요 관광지라고 할 만한 곳이었다. 좁고 복잡한 거리를 지나고 공원을 가로질러 다리를 건넜다. 오르티지아에서 처음 만난 곳은 아폴로 신전 터였다. 고대 그리스의 신전이었다가 나중에는 로마의 교회가 되었다가 이슬람 사원도 되었다가 끝내는 파괴되고 만 역사를 지닌 곳이라고 한다. 신전 앞 노천카페에서 당이 떨어진 아내는 즉석에서 갈아주는 오렌지 주스를, 나와 딸내미는 맥주를 마셨다.


오르티지아 섬에 있는 아폴로 신전

다음으로 간 곳이 바로 시라쿠사 대성당이었다. 유럽은 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성당이 있는데, 특별히 큰 성당을 중심으로 도시가 형성되었다. 그곳 오르티지아도 다르지 않았다. 대성당은 높고 웅장했으며 광장은 넓었다. 그 광장에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젊은 엄마와, ‘이제 유모차 따위는 필요 없으니 당당히 내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듯한 어린 소녀가 있었(나 보)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딸내미를 향해 포즈를 취하느라 처음에는 그 모녀가 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을 몰랐다. 그러다가 누군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는 영감(靈感)이 작동했다. 그래서 바라보니 그들이다. 아이는 우리 나이로 세 살이나 되었을까? 그러니까 코로나 와중에 세상에 태어났을 것이며, 엄청난 사망자를 낸 이탈리아에서 기특하게 살아남은(!) 아이었다. 그 아이가 모처럼 엄마와 산책을 나왔는데, 늘 보던 갈색머리에 흰 피부, 커다란 눈, 큰 코에 노란 털이 더부룩한 아빠나 아재나 할배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아재(혹은 할배)를 보게 된 것이었다. 휘둥그레진 아이의 눈은 더욱 커졌고, 웃음이 터진 나의 작은 눈은 더욱 작아졌다. 내가 사진을 몇 장 더 찍을 때까지도 나를 주시하던 아이는 ‘이상한 나라의 할배’를 더 못 보는 것이 아쉬운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 아이를 향해 가만히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아이는 눈의 힘을 풀며 해맑게 웃었다. 석양이 깃든 시라쿠사의 첫날, 나는 그렇게 잊지 못할 인연 하나를 만들었다.

처음엔 몰랐다
아직도 몰랐다
드디어 알았다
잘 가, 아가야
아재(할배)도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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