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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Nov 14.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08.원형극장과 원형경기장     

시라쿠사에서 맞이하는 사흘 째 아침. 지구의 아침은 어디나 비슷하다. 늦잠을 자고 싶어도 부산스레 움직이는 부지런쟁이들 때문에 덜 깬 잠을 쫓으며 일어나야 한다. 아침식사 준비를 위해 상가에 가서 과일 몇 개와 채소를 사고, 그 옆에 있는 빵집에서 빵을 몇 개 산다. 벌써 두 번째라고 청과물 가게의 젊은 주인이 눈인사를 건넨다. 물을 끓여 커피를 내리고 누룽지를 끓인다. 그 사이 아내는 샐러드를 만들고 2층에 있는 딸을 부른다. 집에 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아침 풍경이다. 그렇게 아침 먹고 치우고 오늘은 느긋하게 투어를 시작하기로 한다.(그러나 느긋한 투어는 늘 희망사항일 뿐이다.)


‘고고학공원’은 숙소에서 1.5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시라쿠사의 모든 볼거리는 오르티지아 섬에 집중되어 있는데, 본섬에서 꼭 가 보아야 하는 유일한 곳이 바로 고고학공원이라니 안 갈 수 없다. 20분이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었지만, 어제 너무 무리한 탓에 걷기보다 자동차를 선택했다. 좁디좁은 시라쿠사의 골목을 돌고 돌아 고고학 공원에 도착했다. 노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2시간치 주차비 3유로를 낸다. 줄 하나도 쳐놓지 않고, 그냥 차도(車道) 가장자리에 세우는 건데 주차장이라 우기며 주차비를 받는다. 처음에는 무조건 기본으로 3시간치 4.5유로 내라는 것을 2시간만 있겠다고 우겨서 3유로만 냈다. (물론 우리는 2시간을 훨씬 초과해서 나왔지만 그 누구도 시비 걸지 않았다. 1시간만 보고 오겠다고 우길 걸 그랬나...)


언덕 위에 있는 고대 그리스의 ‘원형극장’과 언덕 아래 있는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이 대비되어 들어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아고라에서 차별 없이 토론하며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면 지중해가 보이는 언덕 위 극장에 올라가 시와 음악과 연극을 즐겼다. 그래서 원형극장에는 무대와 거리를 두고 원형의 스탠드가 층층이 자리하고 있다. 커다란 무대 양편에는 출연자들의 출입구가 있고 그 뒤편으로 대기실이며 연습실이 있다.

고고학공원 언덕 위의 원형극장

언덕 아래 있는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은 관중석 가까운 곳에 철창이 쳐진 검투사들의 출입구가 있다. 검투사들이 입장하는 순간 철창은 내려가 닫힌다. 둘 중 하나만 다시 열릴 것이다. 그리 크지도  않은 검투장 한쪽에는 사자굴이 있다. 양쪽에서 나온 검투사들은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싸운다. 이미 출구는 없다. 쓰러지는 순간 굶주린 사자가 기다리는 사자굴에 던져질 것이다. 차라리 상대편의 칼에 급소를 찔려 죽는 것이 가장 행복한 죽음이다. 관중들은 같은 인간의 피에 열광한다. 상대편의 검에 찔려 고통하는 모습에 열광하고 사자에게 갈갈이 찢기는 모습에 열광한다. 잔인하다. 잔인하기 그지없다.

언덕 아래의 원형경기장

하필 두개의 원형 유적이 같은 공간에 공존하는 것은 이곳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는 것을 증언한다. 민주정치든 공포정치든 영원한 권력은 없으며 모든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라는 역사의 진리를 웅변한다. 인간의 본성은 선하기도 악하기도 하다는, 성선설과 성악설의 끝나지 않는 논쟁을 대변한다. 왜 이 멋진 곳에 와서 그런 골치 아픈 생각을 하느냐는 지청구를 흘려들으면서 나는 ‘원형극장’과 ‘원형경기장’의 그 기묘한 대비가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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