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흰샘 Nov 17.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09.돈 받는 곳은 무조건 들어가라

우리는 시라쿠사에 있는 동안 마지막 날만 빼고는 매일 오르티지아 섬에 갔다. 정작 본섬에서는 볼 만한 것이 고고학공원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유적은 모두 그 섬에 모여 있기 때문이었다. 볼거리뿐 아니라 놀거리, 먹을거리도 다 그곳에 있었다. 섬 끝에 있는 마니아체 城(Castello Maniace)은 비잔틴제국이 남겨놓은 유적으로 당시 지중해 끝에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시라쿠사를 보호하던 완벽한 요새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은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그곳은 천혜의 요새였을 것이다. 

성 근처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의 석양은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시라쿠사에 도착한 첫날도 우리는 그 성까지 걸어갔었다. 그러나 저녁 시간이라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입장료는 8유로라는 안내판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마니아체 가는 길에 바라본 석양

다음날 우리는 조금 일찍 그 성에 다시 갔다. 성 주변이 해변 공원처럼 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사진도 찍고 산책도 하고 경내의 바(bar)에서 와인도 마시고 있었지만 정작 성 안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유럽의 성들이 다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기로 했다. ‘돈 받는 곳은 무조건 들어가라’는 것이 딸내미의 지론이었다. 맞다. 우리는 관광지든 유적지든 여행을 가면 돈 받는 곳을 싫어한다. 별것도 없는데 돈을 받는 것 같아 기분까지 나쁘다. 

하지만, 돈을 받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공연히 길을 막고 통행료를 받거나 절에 들어가지도 않는데 문화재관람료를 받는 일부 몰지각한 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최소한 수백만 원을 들여 외국여행을 가서는 입장료 1,2만원이 아까워 돈 내는 곳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뒤로도 시칠리아에 있는 동안 우리는 돈 내는 곳은 거의 빼놓지 않고 들어갔다. 그러면 돈이 아까워서라도 더 많이, 더 깊이 보게 되기도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도 마찬가지다. 많이 모이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번잡하고 시끄러워 즐거운 곳은 아니지만 그런 곳들은 빠뜨리지 않는 것이 좋다. 


자, 이제 돈을 냈으니 당당히 성 안으로 들어가 보자. 오르티지아 섬의 끝에서도 다시 다리로 연결된 城은 외부에서 오는 적들의 동향을 모두 파악할 수 있게 3면에 수많은 창문이 달려있었다. 밖에서는 안이 잘 보이지 않고 안에서만 밖을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이를테면 초소인데 그 초소들이 모두 내부에서 연결이 되어 있어, 만약 적이 나타나면 순식간에 성 전체에 알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게다가 성 안은 미로로 되어 있고, 3개 층에 걸쳐 방어선과 공격선이 차례로 구축되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와 같은 분석은 城 좀 다녀본 얼뜨기 전문가의 말이니 믿거나 말거나이다.) 

시라쿠사는 수천 년 동안 지중해의 패권을 다투는 세력들이 전초기지로 삼은 시칠리아 중에서도 가장 요충지였다. 역사에 기록된 것만 해도 주인이 10번 이상이나 바뀐 곳이 바로 시라쿠사였고, 그 중심에 바로 이 성, 이름 외우는데 꼬박 3일 걸린 ‘마니아체’가 있었다. 그런 역사의 뒤안길에 아직 복원이 안 된 채 황량하게 버려진 공간들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 들꽃들이 피어 있었다. 나는 문득 당나라 시인 유우석(劉禹錫)의 그 유명한 시 ‘오의항(烏衣巷)’이 떠올랐다. 한때 너무도 번성했던 진(晉)나라의 중심 거리였던 오의항에 들꽃만 제멋대로 피어있고, 그 시절 권문세가들은 모두 사라져 황량하기 그지없는 풍경을 노래한 시이다. 마니아체 한 구석, 들꽃 몇 송이만 피워 두고 황량하게 버려진 그곳에서 나도 무언가 시심(詩心)을 끌어올리고 싶었으나 능력이 미치지 못했다. 

마니아체 성_버려진 황무지

성을 나설 때 떨어지기 시작하던 빗방울은 제법 굵은 가랑비로 바뀌었다. 모녀는 작은 양산 하나를 받치고 나는 모자 하나로 머리만 가린 채 비를 맞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비는 내리고 돌아갈 길은 멀고, 아침부터 고고학공원을 시작으로 종일 걸었으니 힘든 것이 당연하다. 아내는 결국 배터리가 완전히 방전되고 말았다. 걸음 수는 이미 2만보를 훌쩍 넘었다. 아내를 숙소에 먼저 데려다 놓고, 아직 배터리가 남아있는 나와 딸내미는 장을 보러 갔다. 고기와 채소와 과일을 사고 물과 와인도 샀다. 저녁엔 채소를 볶고 스테이크를 구웠다. 한국에서 가져간 즉석밥과 컵라면은 아내의 기운을 차리게 하는 보약이었다. 그렇게 힘든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내일은 장거리 여행이 기다리고 있다.

      

멀리서 바라본 마니아체 성


작가의 이전글 본조르노, 시칠리아-08.원형극장과 원형경기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