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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Nov 26.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13. 터키인의 계단 아래서...

13. 터키인의 계단 아래서 통구이 될 뻔한 사연          


아그리젠토에서 둘째 날을 맞이했다. 딸내미와 함께 아침에 먹을 빵을 사러 갔다. 숙소 뒤 언덕을 넘어서 작은 터널을 지나면 아파트단지가 나온다. 거기에 당연히 빵집이 있을 것이었다. 빵집을 찾아 길을 걷는데, 길가에 세워 놓은 작은 트럭 근처에 동네 아줌마들이 잔뜩 모여서 떠들고 있다.(시칠리아는 트럭도 소형이다. 고속도로에는 대형 트럭도 다니지만, 시내에서는 아예 큰 트럭을 볼 수 없다.) 가까이 가 보니 트럭에 채소며 과일이 잔뜩 실려 있다. 그러니까 트럭 행상인 것이다. 당연히 건물에 자리한 가게보다 물건이 쌀 것이다. 그러니 동네 아줌마들이 잔뜩 모여 수다를 떨며 물건을 사는 모습이 건너편 슈퍼마켓 주인과 청과물가게 사장은 아주 싫을 것이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비슷하구나 싶었다. 

시칠리아 과일가게도 현금을 좋아한다

시칠리아에서도 동네 가게들은 당연히 현금을 좋아했다. 시라쿠사의 동네 정육점도 그랬다. 현금을 냈더니 반색을 하면서 심지어 고기값을 깎아주기까지 했다. 주인이 따로 있는 음식점이나 큰 마트에선 카드를 내더라도 자영업을 하는 동네 가게에선 현금을 내자는 딸내미의 말이 정답이었다. 우리는 과일가게에 들러 5유로(7천 원 정도)를 내고 과일을 한 보따리 샀다. 우리나라 같으면 최소한 3만원어치는 될 것이었다.

아침을 먹고 아그리젠토에서 꼭 가 보아야 한다는 곳, ‘터키인의 계단’이라 불리는 석회암 절벽이 있는 해변으로 차를 몰았다. 과거에 터키의 해적들이 하얀 계단처럼 이루어진 그 석회암을 통해 육지로 올라와 해적질을 했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데, 터키에서 자기네 이름을 붙였다고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지금 보니 터키인의 계단이 아름답네...

아직 오전인데도 지중해의 투명한 햇살은 옷을 뚫고 들어와 속살을 익힐 듯 뜨거웠다. 언덕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 내려가면서 벌써 우리는 올라올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햇볕만 뜨거운 것이 아니라 날도 여름처럼 더웠다. 땡볕 속에서 한참을 내려가 해변에 닿았지만, 우리가 보려 하는 터키인의 계단은 저~만치 서 있었다. 나무 한 그루, 그늘 한 줌 없는 바닷가를 걷고 또 걸어 그 하얀 석회암 아래 도착했을 때는 아름답고 신기하다는 생각보다 덥고 뜨거워서 미쳐버리겠다는 본능이 훨씬 앞섰다. 딸내미는 모자도 없이 잘도 걷고 잘도 웃으며 사진을 찍는데, 우리는 사진 찍을 마음도 생기지 않았고, 어서 이 땡볕에서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는 햇볕이 너무 강렬해서 권총을 발사했다는 뫼르소가 또 한 번 이해되었다. 

간신히 탈출한 곳이 내려올 때 보았던 해변의 카페였다. 시원한 그늘과 안락한 소파가 있었다. 물론 돈이 만들어낸 시원함과 안락함이었다. 칵테일을 한 잔씩 마시면서 잔잔하게 밀려오는 옥빛 파도를 바라보자 비로소 웬수 같던 지중해가 아름다웠다. 

돈으로 산 시원함과 안락함

더위에 지쳐 숙소로 돌아가 점심을 대충 먹고 좀 쉬다가 저녁때쯤 아그리젠토의 하이라이트인 신전의 계곡에 가기로 했다. 나는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나 보다. 아내는 늘 ‘머리만 대면’ 어디서든 잠이 드는 나를 부러워한다. 여행의 3요소를 ‘돈시사’라 했거니와 그것은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조건에 관한 것이고, 실제 여행 중에 가장 중요한 3요소는 ‘먹싸자’이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야 여행이 괴롭지 않다. 대체로 무엇이든 잘 먹고 어디서든 잘 자는 편인 나와 딸내미는 여행에 특화된 체질이라고, 아내는 또 부러워했다. 강철체력을 가진 딸내미에 비해 체력이 그리 강한 편이 아닌 나로서는 그 세 가지가 잘 된다는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배도 부르고 체력도 보강했으니 또 나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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