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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Nov 25.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12.그리스신전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엊그제 우리는 시라쿠사에서 가장 유명한 맛집이라는 곳을 찾아갔었다. 오르티지아 섬의 중간쯤에 시장이 있고, 그 시장 한복판에 작은 샌드위치 전문점이 있다. 이름하여 ‘보르데리(Borderi)’라는 곳이다. (이름이 엄청 더 긴데 이쯤만 기억해도 대단한 거라고 자부한다.) 거기서 파는 시라쿠사 식 샌드위치인 ‘파니니’가 세계적인 지명도를 지니고 있단다. 아직 점심시간 이전이었는데도 이미 그 집 앞은 라이언 항공사 창구만큼이나 장사진이었다. 어림잡아 두 시간 이상은 기다려야 저걸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맛집의 풍경은 어디나 비슷하구나.’라는 진실을 발견한 것으로 만족하고 우리는 그 소란하고 복잡한 곳을 빠져나왔었다.

시라쿠사를 떠나는 날 아침. 딸내미는 기어이 아침에 문 열기를 기다려 그곳에 가서 파니니 두 개를 사 왔다. 파니니는 바게트샌드위치 비슷하게 생겼는데, 크기는 무시무시하고 내용은 어마어마했다. 혼자 그거 하나를 다 먹는 건 킹사이즈 피자 한 판을 먹는 것과 비슷할 것 같았다. 하나를 잘라서 반은 딸내미가 먹고, 반은 다시 반으로 잘라 우리 부부가 먹었는데, 그것으로 아침 식사가 충분했다. 나머지 하나는 또 반으로 잘라 우리가 묵은 숙소 주인에게 주었다. 현지인들도 긴 시간 줄을 서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인지라, 콧소리가 장기이고 눈웃음이 특기인 젊은 주인 녀석의 입이 함박만큼 벌어졌다. 참, 그 녀석에게는 ‘참이슬’도 한 병 주었다. (아내는, 이게 한국의 대표적인 술이며, K-pop 스타들과 K-drama 스타들도 즐겨 마시는 술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으나 성공하진 못했다.)

월드맛집 보르데리의 파니니

‘숙원사업’이었던 파니니도 먹었겠다, 우리는 이제 완전히 친숙해진 안토니오를 몰고 시라쿠사를 떠나 진짜 진짜 오래된 고대도시 아그리젠토로 향했다. 시라쿠사에서 3시간을 꼬박 운전하여 아그리젠토에 가는 동안 휴게소는 하나밖에 보지 못한 것 같다. 그것도 너무 휴게소처럼 생기지 않아 지나치고 말았다. 이 동네 애들은 운행 중 기름이 떨어지거나 배가 고프거나 변이 마려우면 어떻게 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역시 고대 그리스 때 건설되었다가 로마에 넘어가고 이슬람이 또 들어오고 이탈리아에 편입된 전형적인 시칠리아의 오래된 도시, 아그리젠토는 시칠리아에서 고대 그리스의 유적이 가장 많은 곳이다. 심지어는 고대 그리스의 유적이 그리스보다 많다는 설도 있는데, 그리스를 가보지 못한지라 비교할 길은 없다. 아그리젠토는 시칠리아 대부분의 도시와 마찬가지로 언덕 위에 건설되었지만, 그 아래 드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어 농업을 의미하는 아그리(argri-)가 붙은 이유가 단번에 이해되었다.

아그리젠토 전경

아그리젠토 시내로 접어들어 숙소로 올라가는 길에서 우리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길가 양쪽으로 온갖 쓰레기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들판 곳곳에도 쓰레기들이 흩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청소를 생활의 1번 조건으로 꼽는 아내는 견디기 힘든 장면이었다. 그 많은 관광수입으로 청소 정도는 해야 예의가 아니냐며 분개했다. 사실 이탈리아인들은 오로지 조상 덕에 먹고 살기 때문에 제사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이탈리아인들이 정성껏 모셔야 한다고, 우리네 전통 제사 문화를 수입해 가야 한다고 우리끼리 주장했던 터이다. 그러나 지저분한 거리와 반대로 숙소는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넓고 깨끗한 데다 침실 2개에 욕실도 2개, 커다란 주방과 서재까지 갖춘 독채였다.(이탈리아 책으로 가득 찬 서재는 아내가 즐겨 이용했다. 거기가 와이파이가 가장 잘 터진다며 이준호 콘서트를 시청하시느라...) 창문을 열면 그리스 신전들과, 하늘에 맞닿은 지중해가 펼쳐진, 속된 말로 뷰맛집이요, 뷰깡패다. 

아침에 남겨온 샌드위치에 과일과 컵라면 등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투어를 시작했다. 기차역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 도시의 main street를 걸었다.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가게도 문을 닫은 곳이 많았다. 우리는 이곳이 퇴락한 도시인가 싶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거리마다 사람들이 넘치고 가게들도 모두 문을 열었다. 이곳 사람들은 대낮엔 아무 것도 안 하고 쉬거나 낮잠을 잔다고 한다. 어딜 가도 부지런한 한국 사람들만 낮이고 밤이고 열심히 돌아다닌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없으니 우리는 한가하고 좋았다. 큰길을 벗어나 골목의 계단을 오르고 또 올라 찾아간 성 마리아 성당. 기원전 5~6세기 그리스 신전의 기둥 위에 세운 성당이었다.  이를테면 성황당 주춧돌과 기둥을 살려 교회당을 세운 셈이다. 나는 지금은 성당이 된 그 오래된 그리스 신전의 불룩한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섰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쓴 최순우 선생의 느낌이 이런 것이었겠구나. 그리스 신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니 오래 전 세계사 시간에 배웠던 서양의 옛 역사들이 눈앞에서 한순간에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스 신전 터에 세워진 교회

그 좁고 어두운 골목길을 내려오면서 내가 ‘꼭 마피아들이 은신처로 사용했을 것 같다’고 하자 딸내미가 그런다. 실제 이곳에서 마피아들이 많이 활약했으며 아직도 그들의 그림자가 남아있을 수 있으니 그 이름을 함부로 꺼내면 안 된다고. 그래서 우리는 그때부터 그들을 그냥 ‘마씨’라고 부르기로 했다. 마씨 얘길 하면서 내려오는데, 어느 집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우는 덩치 큰 할배가 우릴 바라본다. 나는 영락없이 마씨처럼 생긴 그 할배가 꺼림칙했으나 딸내미는 웃으며 ‘보나 셀라’라고 저녁인사를 건넸고, 할배는 손을 들며 답례를 한다. 휴우, 마씨 아닌가 보다...

석양을 보러 서둘러 내려갔으나 퇴근 차량에 막혀 해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원래 해변에서 저녁을 먹으려 했으나, 오전 내내 차를 타고 오후 내내 언덕길을 걷느라 지치고 피곤했다. 다행히 근처에 대형 마트가 있어 거기서 과일, 채소, 고기, 와인 등을 사가지고 숙소로 돌아가 느긋한 만찬을 즐겼다. 

한낮엔 여름처럼 덥던 날씨가 저녁이 되자 가을로 바뀌었다. 취기도 오르고 하여 발코니에 나갔더니 저 멀리 내일 가게 될 오래된 신전들의 야경이 들어왔다.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벌판 너머로 지중해가 펼쳐진다. 그 바다 위에 반달이 떴다. 잔잔한 지중해 물결이 달빛을 받아 금빛 윤슬을 만들어 내고, 그 사이로 배 한 척이 지나가는 모습은 그대로 동화나 전설 속의 모습이었다. 하긴, 이곳 시칠리아는, 그중에서도 아그리젠토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의 고향이기도 하다. 아마도 이런 광경들이 그런 상상력을 만들어냈을 것이며, 그 상상력을 거름으로  삼아 위대한 신화와 시와 연극이 탄생했을 것이었다. 오기 전까지는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아그리젠토라는 도시가 나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이미 쓰레기는 마음속으로 용서했다.)

숙소에서 바라본 지중해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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