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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Nov 30. 2022

나는 첫사랑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황동규, <즐거운 편지>


어제 사실상 이번 학기 강의를 마쳤다. 다음 주엔 기말시험이니 어제가 사실상 종강인 셈이다. 매주 강의에서 漢詩 한 편과 우리 시 하나씩을 소개해왔다. 대개 우리 시는 한 두 구절만 소개하고, 마음에 들면 나머지는 각자 찾아보라 하였다.

아무려나 종강 날인지라 특별한 인사도 하고 축복(?)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서인 시 읽기.

나는 어릴 때 다녔던 '국민학교' 사진을 배경으로 걸었다.(지금은 폐교가 된 지 오래되었다.) 그  학교를 함께 다녔던 첫사랑 소녀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황동규의 시를 소개했다.

나중에 자라서 대학생이 되었을 때, 눈이 무릎을 덮게 내리던 어느 겨울날 이 시를 적어 그녀에게 보냈다며, 지금껏 암송하고 있는 이 시를 암송해 주었다.

잔잔한 박수~

그렇게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학생들 대여섯 명이 우르르 앞으로 나온다.

뭐지? 사인을 해 주어야 하나?

그 야무진 꿈이 깨지는 데는 채 5초가 걸리지 않았다. 하나같이 기말고사에 대한 질문이었다. 마치 중고생들 같았다.

“나는 아련한 첫사랑 얘기를 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내내 시험생각만 하고 있었구나...”

나의 탄식에 강의실을 나가던 학생들이 깔깔거렸다.

나의 첫 번째 모교 '나성국민학교'. 지금은 폐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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