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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Nov 30.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14.신전의계곡에 울리던 짱돌 소리

아그리젠토는 고대 그리스가 오랫동안 통치하던 곳이다. 넓은 들판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농산물과 지중해에서 들어온 풍부한 해산물, 그리고 해상 무역을 통한 고급문화와 귀중품 등이 넘치는 도시였을 것이다. 시칠리아의 다른 도시들보다 유난히 그리스의 신전이 많이 남아있는 것을 보며 그랬을 거라고 혼자 내린 결론이다. 우리는 꼬마 자동차 ‘안토니오’를 몰고 언덕을 내려가 신전의 계곡으로 향했다. 

역시 주차장은 줄 하나 쳐 놓고 그냥 울퉁불퉁한 맨땅이었는데 들어가는 곳에 주차권 뽑는 곳이 있고 나가는 곳에 정산하는 곳이 있었다. 대부분의 유적지가 맨땅에 주차를 하게 되어 있었는데 주차비는 칼같이 받고 있었다. 주차장 옆에 세워진 가건물에서 택시 기사가 길을 가르쳐주는 척하며, 유적들을 한 바퀴 다 돌고 다시 돌아오려면 힘드니까 마지막 유적지에서 택시로 모시겠다고 한다. 물론 돈을 내면. 나는 영화 ‘택시운전사’에 나오는 송강호의 명대사 ‘no money, no Gwang-ju’가 생각났다. 우리는 그 친절한 제안을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입장권을 사 가지고 들어가는데 경비원이 짐을 뒤졌다. 이탈리아에서 짐 뒤짐은 몇 번 당했는데, 로마의 콜로세움과 포로로마노, 그리고 바로 이곳, 신전의 계곡이었다. 나는 최근에 바티칸에서 어느 미국 관광객이 교황을 만나게 해 달라고 난동을 부리며 전시되어 있는 조각상 두 개를 넘어뜨려 파손했다는 기사가 떠올랐다. 돌덩이 하나도 세계유산인 곳에 혹시 망치라도, 폭발물이라도 가지고 들어갈까 하여 짐을 뒤지는 것이라 이해했다. 왜 그때 느닷없이, 대학 다닐 때 걸핏하면 길거리에서 사복경찰들에게 짐 뒤짐을 당하던 더러운 기분이 떠올랐는지 몰라... 

신전의 기둥만 남아있다. 건너편으로 아그리젠토 신시가지가 보인다.

‘신전의 계곡’에 있는 신전들은 총 20여개라는데 우리가 본 것은 언덕 위에 있는 대여섯 개의 대표적인 신전들이었다.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콩코르디아(Concordia) 신전이었다. 이 신전은 시칠리아가 기독교로 강제 개종되었을 때 교회로 사용된 덕분에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반 정도가 남은 신전, 기둥만 남은 신전, 기둥 네 개만 남은 신전, 돌덩이만 남은 신전 등 대부분이 파괴된 상태로 남아있었다.

콩코르디아 신전은 가장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콩코르디아 신전 앞에 거대한 동상이 하나 비스듬히 누워있다. 신화 좀 읽어본 나는 팔과 다리가 잘리고 날개가 땅바닥에 처박힌 채 누워있는 청년이 이카로스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미노스에 의해 크레타 섬의 미궁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자 아버지가 만들어준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 탈출하다가 신나서 너무 높이 나는 바람에 태양열에 밀랍이 녹아 바다에 추락해 죽고 말았다는 비운의 청년이다. 그 녀석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준 것이 헤라클래스라지? 콩코르디아 바로 아래 있는 신전이 헤라클래스 신전인 것은 우연이 아닐 터였다. 온전하면 온전해서, 무너지면 무너져서 신전들은 아름답고 놀라웠다.

콩코르디아 앞에 누워있는 이카로스

신전들이 늘어서 있는 터를 지키고 있는 것은 올리브나무와 아몬드나무들이었다. 담장 너머에 있는 땅에도 온통 두 가지 나무뿐이었다. 적어도 수백 년은 넘었을 고목들도 부지기수였다. 올리브나무는 많이 보았지만 아몬드나무는 처음이었다. 아몬드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지금이 한창 아몬드 수확철이라더니 잘 익은 아몬드가 여기저기 껍질째 나무 밑에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아몬드 열매 몇 개를 주워 기념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때 어디선가 돌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젊은 외국인 부부가 두세 살이나 되었을 법한 아들을 데리고 관광을 왔다. 젊은 아비가 돌멩이로 아몬드 껍질을 두들겨 깨면 어미는 아몬드 열매를 잘 발라서 어린 아들의 입에 넣어준다. 아이는 제비 새끼처럼 입을 벌려 받은 열매를 우물거린다. 나는 마치 그 모습이 수천 년 전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재현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나도 아몬드 열매를 몇 개 주워 근처 바위 옆에 있는 작은 짱돌을 찾아 껍질을 깨고 아몬드 열매를 먹어 보았다. 우리가 사 먹던 아몬드보다 몇 배는 고소하고 기름졌다. 아몬드나무에서 잘 익어 금방 떨어진 아몬드를 즉석에서 까먹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터라 그때부터 내 눈길은 자꾸만 신전보다 아몬드 나무 아래로 향했다. 바위 여기저기에 아몬드 껍질이 수북한 걸 보니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렇게 아몬드를 깨 먹었겠구나 싶었다. 아마 수천 년 전 고대인들도 그랬을 것이었다. 신전의 계곡에 울려 퍼지는 짱돌 소리는 수천 년 전후의 인류를 묶어주는 보이지 않는 끈이구나 생각했다.

짱돌과 아몬드껍질

드디어 신전의 계곡에 석양이 찾아왔다. 해가 기울자 신전의 계곡으로 까마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까마귀들은 신전의 지붕이든 기둥이든 가리지 않고 앉아서 깍깍 울어댔다. 신전의 주인은 까마귀였다. 한시(漢詩)에서 역사적인 장소에 찾아가 옛날을 그리거나 고금의 변화를 노래하는 시를 회고시(懷古詩)라고 한다. 회고시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이 바로 까마귀이다. 그러고 보면 까마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오래된 유적을 좋아하는 습성을 가진 동물인지도 모른다. 역사학자들과 동물학자들은 당장 ‘까마귀와 유적의 관계에 관한 공동 연구’를 시작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아무려나 신전의 계곡 석양은 우리가 가장 보고 싶어 하던 장면이다. 콩코르디아 신전 언덕에 서서 지중해 너머로 사라지는 내 생애 유일한 날의 유일한 석양을 바라보았다. 해가 완전히 떨어져 신전의 계곡에 어둠이 깔리자 조명이 켜졌다. 기둥 아래서 위쪽을 향한 조명으로 인해 신전은 한층 높고 신비롭게 보였다. 신비로운 건 신비로운 거고, 피로와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는 배가 고픈데, 그새 배가 부르기 시작한 구월 아흐렛날의 달이 지중해 위에 떠올랐다.

신전에서 바라본 지중해의 석양, 그리고 까마귀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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