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당연히 대부분의 소식이 편지로 오갔습니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 쓰는 것을 좋아한 나는 ‘심지어’ 편지 쓰기도 좋아했지요. 서울에 돈 벌러 가셨다는, 너무나 멀고 서먹서먹했던 아버지에게도 편지를 썼고, 그 아버지를 따라 열 살 때 서울에 와서는 사흘이 멀다 하고 글도 모르는 할머니와 엄마에게 눈물로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그 편지들은 모두 누이들이 읽어 드렸을 터이고, 두 분도 함께 우셨을 테지요.
한없이 외로웠던 나는 ‘국군장병 아저씨께’로 시작되는 위문편지도 정성스럽고 간절하게 쓰곤 했습니다. 얼마나 진심이 가득 담겼던지 그 편지를 받은 아저씨가 답장을 보냈고, 결국은 휴가를 나와 나를 찾아오기까지 했더랬습니다. 나는 당시 트럭 운전사로 사우디에 돈 벌러 간 고모부 뻘 되는 분에게까지 편지를 보내곤 했지요. 당시에는 국제우편이 흔치 않았던 때라 나는 고모와 나의 편지를 들고 서소문에 있던 <동아건설>까지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면 회사에서 한꺼번에 모아 인편으로 사우디에 전달을 한다고 했지요. 돌아오는 답장도 그런 경로였습니다. 그분은 나의 편지가 힘든 외국 생활에서 큰 위로가 되었다 하셨지요.
좀 더 자라서, 한 소녀를 짝사랑하면서 쓰기 시작한 연애편지는 아마도 나의 문장 실력을 한 뼘은 늘려 놓았을 것입니다. 한 줄을 쓰기 위해 책을 한 권 읽은 일도 있으니 말이지요. 어쩌다 답장이라도 올라치면 그야말로 행간(行間)을 읽고,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는 신통력을 경험하기도 했더랬지요. 참, 외국의 어떤 소녀와도 펜팔을 했군요. 그나마 짧은 내 영어 실력은 그때 또 한 뼘 자랐을 터입니다. 나의 지금 아내도 사실은 편지가 계기가 되어 친해진 것이라고 아내가 말해 주더군요.
이제 시대가 변하여 편지를 쓰는 일은 흔치 않게 되었습니다. 나 또한 세상 편한 이메일이나 문자메시지로 편지를 대신합니다. 돈도 시간도 들지 않고 즉각 전달하고 답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편리한가요? 그러나 무언가 허전합니다. 오히려 쏟아지는 문자 더미에 파묻혀 사는 것 같기도 합니다.
또 이야기가 곁가지로 샜습니다. 늘 이런 식이지요... 오늘은 연하장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습니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우체국에 가서 연하장을 삽니다. 어느 해인가는 너무 바쁜 일이 밀려서 연하장을 잊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 주변의 모든 우체국에 전화를 걸어도 다 떨어졌다기에 중앙우체국에까지 가서 사온 적도 있습니다. 아무려나 한 해도 연하장을 사지 않은 해는 없습니다. 연하장을 보내는 분들은 대개 정해져 있습니다. 대학 때 은사님들, 뒤늦게 공부할 때 도움 주신 은사님들, 함께 공부한 벗들, 그리고 나이와 상관없이 마음의 어른으로 모시는 분들... 세월이 흐르고 나도 나이를 먹다 보면 더 이상 연하장을 보낼 수 없는 분들이 늘어날 지도 모릅니다. 아직 연하장을 보낼 곳이 줄지 않았다는 것은 그래서 큰 위안입니다. 나는 오늘 열다섯 장의 연하장을 샀습니다. 덕분에 또 한 해를 잘 살아냈다는 감사를, 또 한 해를 살아내 보자는 다짐과 약속을 적고자 합니다. 나와의 약속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