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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Dec 05.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15.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

신전의 도시 아그리젠토를 떠나 시칠리아의 마지막 여행지 팔레르모로 가는 날이다. 그냥 가기 아쉬워 어제 가려다 못 간 아그리젠토박물관에 들렀다. 아니나 다를까? 주차장은 박물관 건너편의 공터다. 주차선은 물론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맨땅 아무 데나 차를 세우되 돈은 내고 가라고 출입구에 돈 먹는 기계를 단단히 박아 놓았다. 그게 아그리젠토식 주차장의 법칙인가 보다. 심지어 그곳은 고대 그리스의 신전 터였다.

고대 신전터이자 올리브나무 농장이자 주차장이자 줄도 안 그어놓고 돈 받는 곳이다

아그리젠토는 박물관도 옛 신전 터에 지었는데, 성 마리아 성당이 그런 것처럼 무너진 신전의 기둥을 그대로 살려 건물을 올렸다. 박물관에는 고대 그리스 유물부터 로마 시대의 유물까지, 그야말로 국보급 유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섬나라 가운데서도 그리 크지 않은 소도시에 그런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고, 그렇게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은 더욱 놀라웠다. 

거기 전시된 유물들을 일일이 주워섬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눈길 닿는 곳마다 탄성이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없었지만, 나는 박물관 천장을 떠받치는 자세로 세워진 거대한 석상에 유독 눈길이 갔다. 나는 그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틀라스(Atlas)인 것을 첫눈에 알아보았다. (그도 나를 첫눈에 알아보았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틀라스도 神이니까... 그런데 그 박물관에 있는 아틀라스가 어쩌다가 한쪽 발목마저 잘리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는 天界를 어지럽힌 죄로 평생 하늘을 떠받치고 서 있어야 하는 벌을 받은 거인이다. 

한쪽 발목마저 잘린 아틀라스가 공중에 떠서 하늘을 받치고 있는 신공을 발휘하고 있다

나는 문득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여~”하는 노래와 함께, 언젠가 늦은 밤 서울 지하철역에서 보았던 어떤 노숙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기록한 사진과 글을 소환해 본다.  

   

늦은 시각 지하철역에서, 술과, 술을 못 이기는 잠에 반쯤 취해 걷다가 느릿느릿 움직이는 물체를 보았다. 취기(醉氣)는 나의 모든 기관과 세포를 완전히 점령하여 판단도, 시력도 흐리게 만들었다.
처음엔 거북인 줄 알았다. 지하철역에 거북이가? 그러다 갑자기 취기가 확 깼다. 사람이다... 허리가 90도도 더 굽은, 늙은 여자 사람... 그는 청테이프로 도배된 배낭을 메고, 역시 청테이프로 칭칭 감은 비닐 여러 개를 양 손에 매달아 끌면서 거북이보다도 느린 걸음으로 계단으로 향했다. 이윽고 계단 앞에 이르자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도저히 저 상태로 계단을 오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양손이 자유로워야 기어서라도 오를 텐데, 양손에는 그의 살림살이 전부가 들려있다. 누군가 도와주지 않는다면, 거대한 벽을 만난 거북이처럼 그는 영영 계단을 오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때마침 역으로 들어오는 전동차에 서둘러 몸을 싣고서야 나는 나의 無情함을 깨닫고 자책한다.
걸핏하면 삶이 무겁다고 푸념했던 나여! 너는 정말 무거운 게 뭔지 알기는 하는가?     
내게 '삶의 무게'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신 분...

아틀라스 신화가 왜 생겼겠는가? 인생이라는 것이 결국은 온 세상을 떠받치고 사는 것처럼 무거운 거라는 메타포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자못 비장해졌다. 한번 생겨난 비장은 또 다른 비장을 낳아, 이 아름답고 찬란한 아그리젠토를 내 생애 다시 올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비장해졌으며, 이제 팔레르모에 가면 열흘 동안 우리와 동행한 안토니오와도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또 비장해졌다. 돌아보면 아그리젠토의 2박3일은 소설의 5단계인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을 닮아 있었다. ‘발단’은 더러웠고(쓰레기), ‘전개’는 아름다웠으며(지중해의 달빛), ‘위기’는 뜨거웠고(지중해의 햇볕), ‘절정’은 놀라웠으며(신전의 계곡), ‘결말’은 그렇게 비장했던 거시여떤 거시여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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