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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Dec 08.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16. 올리브나무가든과 안토니오

신전의 도시 아그리젠토를 떠나 팔레르모로 가는 길은 또 멀었다. 이번에도 점심시간이 애매하여, 아무래도 팔레르모에 들어가면 브레이크타임에 걸릴 것이 분명해 보였다. 검색의 귀재인 딸내미가 또 어딘가를 검색했다. 고속도로에서 나가 215번 지방도를 지나 이름도 없는 농로를 따라가는 우리나라 어느 농촌 같은 길을 한참 달렸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길만 하나 나 있는 언덕이 꼭 첫날 타오르미나를 찾아가던 길 같았다. 그러나 이미 경험을 한 터라 우리는 마을이 나올 것을 믿고 끝까지 올라갔다.


언덕을 넘어서자 마을이라 하기에는 크고 도시라 하기에는 작은, 꼭 우리나라 어느 시골의 읍내 같은 곳이 나타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빌라프라티(Villafrati)라는 이름을 가진 팔레르모에 속한 소도시였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의 무슨 광역시에 딸린 면 소재지쯤 될 것이었다. 거기 읍내에 식당을 하나 찾아낸 것이었다. 주차장이 딸린 뜰과 과수원까지 거느린 넓은 식당으로, 우리나라 식으로 하자면 ‘올리브나무가든’ 정도로 이름 붙이면 딱이겠다 싶었다. 우리는 애차(愛車) 안토니오를 올리브나무 그늘 아래 세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올리브나무가든

안에 들어가자 시골 식당치고는 너무 넓고 커서 또 한 번 놀랐다. 아직 점심을 먹기에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나는 나이 지긋한 식당 주인이 아마도 이 지역 유지일 것이라 짐작하였다. 곧 이어 점심을 먹으러 들어오는 사람들마다 주인에게 인사를 하고 주문을 하는 것으로 보아 나의 예감이 틀림없다고 혼자 으쓱해졌다. 아무려나 이 작은 읍내에 이토록 큰 식당이고 보면, 결혼식 피로연도 이 식당에서 할 것이며, 오면서 보았던 마을 입구 언덕배기의 공동묘지에서 장례식이 끝나도 이곳에서 모일 것이었다.

우리는 맥주를 곁들인 스테이크와 파스타로 훌륭한 점심식사를 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우리나라 어느 식당에나 있는 커피 자판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저 올리브나무 그늘아래 벤치에 앉아 달달한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오래된 올리브나무 잎들이 바람결에 들려주는 시칠리아의 전설 이야기나 들었으면 좋겠다는 허무낭만적인 생각이나 하면서 ‘올리브나무가든’을 빠져나와 팔레르모로 향했다.


팔레르모는 시칠리아의 수도답게 고대부터 중세, 그리고 현대가 모두 어우러진 대도시였다. 우리는 팔레르모 교통의 중심인 Stazione Centrale(우리말로는 ‘중앙역’이 제격이겠다) 바로 뒷골목에 딸내미가 예약을 해 둔 숙소에 묵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과제는 열흘 동안 우리와 함께 시칠리아 곳곳을 누빈 작은 차, ‘안토니오’를 돌려주는 일이었다. 우리는 시칠리아 첫 도착지인 카타니아에서 안토니오를 빌렸고, 돌려주는 곳은 마지막 여행지인 팔레르모였다. 


팔레르모는 대도시답게 시라쿠사나 아그리젠토처럼 길도 좁지 않았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심지어’ 3차로였다. 렌터카 회사는 당연히 팔레르모 공항 근처에 있을 것이었다. 이미 그렇게 안내도 받았고, 내비에도 그리 찍혀 있었다. 그런데, 분명 안내 받은 주소를 치고 가는데 안토니오는 자꾸 이상한 언덕길을 꾸역꾸역 올라간다. 언덕 위에는 여지없이 오래된 도시가 자리잡고 있다. 내비가 안내한 곳은 언덕 꼭대기의 오래된 성당 앞이었는데, 아무리 봐도 렌터카 사무실 같은 것은 없었고, 있을 만한 곳도 아니었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하고, 반납 시간은 다가오는데, 안토니오는 길을 잃었다. 자, 처음부터 다시 하자. 언덕을 내려가 큰길까지 간 다음 다시 주소를 찍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네 골목으로 한참을 들어가더니 더 이상 가지 못하겠다고 멈추어 버린다. 막다른 골목이었다. 두 여인은 안절부절 못했지만, 나는 안토니오가 우리와 헤어지기 싫어서 심통을 부리는 것이니 잘 달래서 다시 한 번 시도해 보자고 농담을 하며 쿨한 척을 했다. (하지만, 불안하고 배고프고 오줌 마려운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안토니오는 열흘 동안 우리를 태우고 시칠리아 곳곳을 누볐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무슨 공사장 끝에 있는 렌터카 사무실을 찾았다. 반납 약속 시간을 불과 몇 분 남겨둔 시점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열흘 동안이나 우리를 태우고 시칠리아의 언덕과 협곡과 해변과 골목길을 누빈 안토니오와 헤어질 생각을 하니 못내 섭섭했다. ‘또 좋은 여행객 만나 신나게 시칠리아를 누비거라. 안전하고 건강해라.’ 사람에게 하듯이 속으로 인사하며, 나는 안토니오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부디 안전하고 건강해라, 안토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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