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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Dec 16.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19.내가 '국뽕주의자'가 된 이유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롭고 여유롭고 다채롭고 풍요로웠던 시칠리아를 떠나 로마로 가는 날. 미워도 다시 한 번,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또 라이언 항공을 타야 했다. 하도 심하게 덴 적이 있기에 이번에는 3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정시 출발, 정시 도착을 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게 순조롭지는 않았다. 나는 거금 2.5유로를 주고 산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무심코 가방에 넣어 두었다가 검색대에서 걸려서 온갖 눈총을 다 받고 빼앗기고 말았다. 그래도 내 앞에 들어가다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비상벨이 울려 벌을 서고 있는 사람보다는 나았다. 그는 영문도 모른 채 발자국 두 개가 그려진 곳에 부동자세로 서서 놀란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다. 영락없는 위리안치(圍籬安置) 형벌이다. (심보가 고약한 나는, 그의 최후를 보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물을 빼앗기면서 또 느끼건대, 세상에서 여행하기 가장 좋은 나라는 역시 우리나라다.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세 가지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임을 부인할 자는 없으리라. 일단 우리나라는 물 인심과 화장실 인심이 세계 최고다. 거기에 하나 더하면 와이파이 인심도 세계 제일이다. 내가 느닷없이 ‘국뽕주의자’가 된 이유는 그놈의 물과 화장실과 와이파이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어딜 가나 공중화장실이 널려 있고, 급하면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면 쉽게 화장실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유럽은 일단 화장실 찾기가 어렵다. 왜 그리 꼭꼭 숨겨 놓는지 모를 일이다. 게다가 웬만한 화장실은 유료다. 심지어 돈을 내고 들어가는 박물관이나 식당 화장실에서도 1유로를 요구하는 곳이 많다. 그것도 대부분은 변기뚜껑이 없는 화장실이다. 이전의 유럽 여행에서 하도 화장실 때문에 곤란한 일을 많이 겪었기에 이번에는 할 수 있으면 숙소에서 해결하려 했다. 자유여행의 장점이다. 패키지여행에서는 대부분 이동 시간이 많고 자유 시간은 적어 어딜 가면 화장실 찾느라 시간이 다 가 버릴 때도 있다. 그러니 유럽을 여행할 때 무료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으면 안 마려워도 무조건 들어가라는 말이 실감나는 것이다. 나는 유럽여행 중에 무료로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는 곳을 지도로 표시해 주는 앱을 개발한다면 대박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 아이디어를 어느 기업에서 채택하여 1년 동안 유럽을 샅샅이 답사할 비용을 다 대준다면 한번 생각해 보겠다.)

제법 괜찮은 음식점 화장실에도 변기뚜껑은 없었다

물은 어떤가? 우리나라는 식당에 들어가 앉으면 물부터 내놓는다. 아니면 ‘물은 셀프’니 배 터지게 마셔도 좋다고 안내한다. 이탈리아도 식당에 들어가 앉으면 가장 먼저 물을 마시겠느냐고 묻는다. 당연하지 않은가? 고개를 끄덕이거나 ok라고 말하면 반색을 하며 물을 한 병 가져온다. 최소한 2유로 내지 3유로(우리 돈으로 3, 4천원)다. 환장한다. (마트에서 산 3유로짜리 와인도 맛만 좋던데, 물값이 3유로라니...) 물뿐이 아니다. 식당에 들어가서는 메뉴 보고 내가 주문할 거만 주문해야지 그밖엔 어떤 물음에도 함부로 고개를 끄덕이면 안 된다. 특히 물은 무조건 no다.(물론 목이 말라 죽을 지경이라면 당연히 비싸게라도 물을 사 먹어야 한다. ‘무조건 no’라는 내 말을 믿고 탈수 증세로 쓰러질 수도 있기에 책임을 면하기 위해 쓴다.) 우린 항상 물을 가방에 가지고 다니면서 식당에서도 거리낌 없이 꺼내놓고 마셨다. 내돈내산내물. 시비 걸 자 누구랴.


그런데 이 동네 물 값이 그야말로 ‘봉이 김선달 대동강 물 팔아먹기’ 식이다. 일단 식당은 그렇다 치고, 공항이나 관광지 가게에서 파는 물은(물도 맛이 ㄷㄹㄱ 없다) 500ml 한 병에 보통 2.5유로(약 3천5백원)이다. 그런데 마트에서 파는 2L짜리 8개가 2유로다. 나는 공연히 계산기를 두들겨서 내 속을 스스로 뒤집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말았다. 2L 8개면 16L니까 500ml의 32배다. 그런데 500ml는 2.5유로, 16L는 2유로니까 환산하면 40배 차이가 난다!! (이런 날강도, 아니 물강도 같은 놈들~) 500ml를 동네 가게에서는 0.5유로에 살 수 있다. 그거 두 개 사서 다 마시고 나면 2L 짜리 물로 보충하는 게 제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나는 이렇게 긴 글을 쓰는 것이다.

와인 값에 맞먹는 물값

국뽕의 세 번째 요소는 공공 와이파이다. 우리나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의 IT 강국이다. 그런 만큼 와이파이의 인프라 또한 너무나 잘 되어 있다. 공공장소는 물론이거니와 웬만한 건물에도 와이파이가 공짜로 제공된다.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은 이게 안 된다. 심지어 공항도 좀 작은 곳에서는 와이파이가 잘 안 터진다. (와이파이가 안 터지는 대신 내 속이 터진다.) 그래서 이번에도 딸내미가 자그마치 10GB 짜리 유심칩을 하나씩 사 주었다.(내가 국내에서 열 달 동안 쓰는 데이터 양이다.)  와이파이 인심이 인색한 유럽여행에서 필수품 중 하나가 바로 넉넉한 용량을 지닌 유심칩이다. 현대의 외국여행에서는 스마트폰이 필수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더 그러하다.

이런 유심칩 하나면 유럽에서 15일은 넉넉히 버틸 수 있다

그러니 유럽을 여행할 때는 물통을 항상 지참하라. 무료 화장실은 보이는 대로 들어가라. 넉넉한 용량을 가진 유심칩(물론 해당 국가의 유심칩이다)을 준비하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애국자 내지는 국뽕주의자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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