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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Dec 18.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21. 불순한 충동

생각만 해도 욕이 절로 나오는 라이언항공을 타고 로마로 돌아왔을 때, 로마공항은 석양이 붉게 타고 있었다. 로마에서 묵을 숙소의 젊은 집주인이 안토니오처럼 작은 자동차를 몰고 공항까지 우리를 데리러 와 주었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50유로를 지불했는데, 그 녀석은 우버택시를 타면 최소 80에서 100유로라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로마의 택시비를 경험했던 우리로서는 그저 감사하다고 거듭 머리를 조아릴 밖에 도리가 없었다. 고속도로를 한참 달려 로마 시내로 접어들자 길이 꽉 막혔다. 벌써 차창 밖은 어두워졌고, 하늘에는 달이 떠올랐다. 보름달에 가까운 배부른 달이었다.

우리가 묵을 곳은 로마 외곽에 있는 주택가였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까지는 걸어서 5분 정도, 지하철역까지는 10분 정도 걸리니 대중교통도 좋은 편이었다. 로마에서는 대중교통으로만 다녀야 하기에 우리의 가이드이자 보호자인 딸내미가 그런 것들을 고려하여 예약한 집이었다. 딸내미는 다음날 우리 부부보다 사흘 앞서 귀국하기 때문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벌써 9시가 넘어서 문을 연 식당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마침 숙소 옆에 ‘메콩(Mekong)’이라는 베트남 음식점이 있었다. 우리의 우려와는 달리 식당은 만원이었다. 이탈리아 음식점은 보통 밤 11시나 11시 반까지 영업을 하는데, 9시에서 10시가 가장 붐빈다고 했다. 키 큰 이탈리아 사장은 자리가 없다고 했는데, 우리 동네 ‘부산아지매집’ 주인처럼 생긴 아담한 동양 아줌마가 잠깐 기다려 보란다. 아마도 그곳 지배인인 것 같았는데 인상은 베트남 사람보다는 중국사람 같았다. 같은 동양인이라서 짠했는지 어찌어찌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서양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고생하던 아내가 가장 반색을 했다. 쌀국수는 우리나라에서 먹는 것과는 좀 달랐지만 따끈한 국물과 쌀로 만든 면은 느끼한 속을 달래주기에 충분했다. 덕분에 만족스럽게 저녁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딸내미가 귀국할 비행기는 다행히 저녁에 출발할 예정이라 우리는 그 유명한 보르게세미술관에 가기로 했다. 숙소 근처에도 미술관에 가는 버스가 있기는 한데 1시간에 한 대 정도로 시간을 가늠할 수 없어 우리는 푸리오까밀로(Furio Camillo)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로마 교통의 중심인 떼르미니에서 버스로 갈아타기로 했다. 실은 그것도 부모를 객지에 두고 떠나는 딸의 작전이었다. 아무튼 우리는 지하철역에서 차표를 끊는 법, 지하철의 방향을 알아두는 법, 버스표를 끊는 방법 등을 익혔다. 아울러 버스 시간을 알려주는 앱을 사용하는 방법도. 

보르게세미술관 또한 유럽의 유수한 미술관과 더불어 미술 교과서에 등장하는 명작들을 다수 모셔놓은 곳이다. 가장 대표적인 전시품은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의 조각 작품들이었다. (베르니니에 대한 자세한 소개는 굳이 하지 않겠다. 아무튼 보르게세미술관은 그의 조각 작품을 보러 가는 것이다.) 미술관은 당연히 사전에 예약을 해야 하고, 작은 손가방도 맡기고 들어가야 할 만큼 입장도 까다로웠다.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므로 순순히 따라야 할 뿐 아니라, 그런 곳일수록 꼭 가 보아야 한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바로 사람의 눈길을 순식간에 붙잡는 조각 작품이 있다. 바로 <페르세포네의 납치>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이다. 지옥의 신 하데스가 너무도 아름다운 페르세포네를 납치하여 아내로 삼았다는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했다. 페르세포네를 손에 넣은 하데스의 얼굴은 희열로 빛나고, 한 손으로 하데스의 얼굴을 밀어내며 완강히 거부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와 절망이 가득하다. 어쩌면 돌로 만든 조각상에 저렇게 완벽한 감정을 불어넣을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 조각상 앞을 쉬 떠날 수 없었다. 

베르니니_페르세포네의 납치

그런데 정작 나의 눈길을 붙들어 놓은 결정적인 장면은 페르세포네의 허리와 허벅지를 잡고 있는 하데스의 손이었다. 왼손은 페르세포네의 허리를 완강하게 감싸는 바람에 손가락이 절반이나 그녀의 살 속에 묻혀 있다. 그녀의 허벅지를 강하게 붙들고 있는 오른손은 팔뚝의 근육과 손등의 힘줄까지 완벽하게 표현했다. 그의 손에 붙들린 그녀의 허벅지 살은 힘의 크기만큼 움푹 들어가 있다. 이것이 정말 돌로 만든 조각품이란 말인가? 돌로 사람을 형상화한 것이 아니라, 마치 산 사람들이 그대로 굳어져 돌이 된 것만 같았다. 나는 저것이 정말로 돌인지 믿어지지 않아 페르세포네의 허리와 허벅지를 직접 만져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꼈다. 내가 만져도 그녀의 육신은 탄력 있게 들어갈 것만 같은 것이었다. 

나는 저 허벅지를 만져보고 싶다는 불순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나는 문득 베르니니가 전설 속의 피그말리온을 꿈꾼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키프로스의 왕 피그말리온은 너무도 아름다운 여인을 조각해 놓고 그 조각상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와 함께 자고 입 맞추고 사랑하는 정성에 감복한 아르테미스가 그 조각상을 정말로 여자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피그말리온은 그녀에게 갈라테이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잘 살았다... 그런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 교육학에서도 가끔씩 오르내리는 ‘피그말리온 효과’이다. 

커다란 방마다 한 가운데는 베르니니의 조각품들이 있고, 벽과 천장에는 또한 세계적인 미술품들이 무수히 걸려 있었다. 우리는 몹시 지쳐 있었지만 그 어마어마한 작품들을 놓칠 수는 없었다. 페르세포네의 납치만큼이나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조각상이 다비드(다윗) 상이었다. 작은 양치기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향해 돌팔매를 던지는 순간을 조각한 것이었다. 적을 응시하는 다윗의 눈매와 앙다문 입술, 팔매를 잡은 팔뚝과 손의 긴장감, 그리고 허리의 반동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반쯤 돌린 몸과, 두 다리의 조화가 그대로 살아있는 사람의 모습 같았다. 바람에 흩날리는 옷자락과 팔매 끈까지를 거대한 하나의 돌로 조각해 낸 솜씨를 나의 형편없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어서 나는 그저 보이는 모습만 묘사할 밖에 도리가 없었다. 

골리앗을 노리는 다비드의 눈빛, 입매, 팔과 다리의 근육은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나는 또 언제 오게 될지 모르는 미술관을 떠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무엇보다 페르세포네의 납치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그곳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아까는 한 떼의 고등학생들(수학여행을 온 것인지, 현장학습을 온 것인지, 그곳 학생들도 우르르 몰려다니며 떠들어대는 건 우리나라 아이들과 다름없었다) 때문에 꼼꼼히 보지 못했던 조각을 빙 돌아가면서 한 곳도 빼놓지 않으려 애쓰며 보고 또 보았다. 그리고 또 탄식하였다. 아, 저 조각상을 한번만 만져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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