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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Dec 24.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25.생태학자와 신혼부부

로마를 떠나기 하루 전, 우리는 딸내미가 예약해 둔 한나절 패키지여행을 떠났다. 콜로세움과 포로로마노를 중심으로 한 여행이었다. 숙소 근처에 콜로세움까지 가는 버스가 있지만 언제 올지 모르고, 지하철 타는 방법도 익힐 겸 푸리오까밀로 역에서 떼르미니로 가는 B선 지하철을 탔다.(로마에는 지하철 노선이 A와 B, 딱 두 개뿐이다. C노선을 만들고 있는데, 땅만 파면 유물과 유적이 쏟아져 나와 공사가 16년 째 제자리걸음이라 했다.) 떼르미니에서 다시 A선으로 갈아타면 콜로세오 역으로 바로 갈 수 있다. 

일찌감치 도착해서 콜로세움 앞에서 빈둥거리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우리는 얼른 우산을 펼쳤다. 가만 보니 우산을 쓴 사람들은 모조리 동양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모두 한국 사람이었다. 터키인의계단에 갔을 때도 양산을 쓴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뿐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철저한 준비성은 가히 세계적이다. 하도 외침(外侵)을 많이 받다 보니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이 아예 유전자에 인자된 때문일 것이라고 혼자 단정해 버렸다. 

3층에서 내려다본 콜로세움 내부

콜로세움은 수백 년째 보수공사 중이었다. 7년 전에도 공사 중이라 콜로세움 내부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다행히 이번에는 들어갈 수 있었다. 영상으로만 보던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니 놀랍기 그지없었다. 이런 거대한 건축물이 2천 년 전에, 그것도 겨우 8년 만에 지어졌다는 것은 더욱 놀라웠다. 콜로세움은 시칠리아에서도 보았던 원형경기장의 원조이자 대표이다. 당시에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문화였다 해도, 결국은 통치자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인간의 잔인성을 이용하여 피를 보며 환장하게 만들어 딴 생각 못 하게 하고자 만든 것이 바로 콜로세움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또 비장해진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또 무엇에 홀려... 그만두자.

팔라티노 언덕에서 바라본 구 로마시내

그렇게 14박 16일의 이탈리아 여행이 드디어 막을 내리고 있었다. 애당초 방점을 찍은 것이 시칠리아 여행이었고, 로마는 사실 보너스였는데, 로마 자유여행도 나름대로 즐거웠다. 모든 장거리 여행이 그렇듯이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런 고생이 있어야 travel의 어원이라는 travail의 취지에 맞지 않겠는가?      


로마를 떠나는 날, 석양은 유난히 아름다웠다. 비행기 좌석은 뒷 칸의 두 번째 자리였다. 로마에 올 때와 같은 자리였는데, 이코노미 좌석 가운데서는 덜 답답하고 덜 불편한 자리였다. 이 또한 딸내미의 배려의 결과이다.

복도 쪽에 앉은 아내는 만족이었으나 나는 아니었다. 가운데 자리인데다 오른쪽에 120kg는 되어 보이는 거구의 서양인이 앉았다. 팔걸이는 아예 그가 다 차지하고도 부족해 내 자리까지 팔꿈치가 넘어오고, 연신 기침을 해다는 것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게다가 이분이 좁디좁은 비행기 밥상(?) 위에 책을 잔뜩 쌓아 놓았는데 제목을 보니 모두 생태와 환경에 관한 것이다. “저기요, 서양 형님.(수염만 났지 사실 ‘민증’ 까면 나보다 동생일지도 모른다.) 생태계에서 우선순위를 정할 수 없다고 하시겠지만, 그래도 우선 곁에 앉은 인간의 생태계도 좀 고려해 주쇼.”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이유는 딱 한 가지. 그렇게 말 할 외국어 실력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상 쓰지 않기로 한다. 이렇게 길고 고생스런 여행을 했으면 뭔가 성찰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좀 느긋하게, 할 수 있으면 웃으며 살려 한다. 카메라 앞에서만 웃는 배우처럼 말고, 관객 앞에서만 웃는 삐에로처럼 말고, 평소에도 늘 웃음이 살짝 밴 표정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서산 마애삼존불의 미소 만큼이면 딱 좋겠다.


우리 좌석 바로 앞의 맨 앞자리는 이코노미석 가운데서는 최고의 명당자리이며, 그래서 같은 이코노미석 가운데서도 약간 비싼 자리다. 거기 두 자리에 모녀가 앉아있고 한 자리에 젊은 여자가 앉았다. 그런데 덩치 큰 사내 녀석 하나가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이 틈만 나면 그 젊은 여자 곁에 와서 노닥거린다. 가만 보니 왼손에 똑같은 반지를 끼었다. 아하! 신혼여행을 온 신혼부부로구나. 원래는 둘이 앞자리를 예약하려 했는데 모녀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고민하다가 여자를 편히 앉히기로 하고 자신은 기꺼이 불편한 곳으로 정한 게로구나. 그 모습에 약간 우습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해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제자들 주례를 몇 번 서 본 경험자로서, 간단명료하게 주례사를 하자면 이렇다. “그대 그 마음 오래도록 변치 마라. 그러면 너와 네 가정이 두고두고 편안할 것이다.”

모든 것이 용서되고 모든 것이 좋아 보이는 귀국길이었다.

그날, 로마공항의 석양은 유난히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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