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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Dec 24. 2022

본조르노, 시칠리아-에필로그, 그리고 소심한 부탁...

나의 시칠리아 여행기를 읽은 사람들 가운데 김영하의 책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은 이들은 나의 글이 그의 글과 비슷하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 이 시대 최고의 문인 가운데 한 사람인 김영하의 글과 비슷하다는 말은 나를 한껏 고무시켰으나, (교만하게도) 나는 또 은근히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다. 혹시 그들이 내가 김영하를 흉내 낸다고 생각할까 보아서였다. 맹세컨대 나는 그의 글을 단 한 줄도 읽지 않고 여행을 떠났고, 여행기를 썼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이 옹졸함은 또 어쩔 것인가...) 

여행기를 마치고 나서야 나는 김영하의 여행기를 읽었다

여행기 쓰기를 마치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김영하의 시칠리아 여행기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읽었다. 명실상부 이 시대 최고의 글쟁이라 할 수 있는 작가의 글인지라 그야말로 맛깔나고 재미있다. 그런데 읽을수록 내가 보고 느낀 것과 내가 표현한 것들과 비슷한 부분들이 많아 나의 독자들이 오해할 만하다고 이해한다. 다만 그의 풍부한 인문학적 지식과 글 솜씨가 더해져 그의 글은 화려하고도 재미있는 대신 내 글은 쓰다 만 일기 같은 글이 되어 버린 것이 속상할 뿐이다. 아무려나 나는 시칠리아 기행을 쓰면서 간절히 읽고 싶었던 그 책을 책장에 꽂아둔 채로 끝내 읽지 않았다. 그의 글을 읽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글쓰기를 포기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니라면, 나도 모르게 그의 글을 따라가고 말았을 것이다. 


여행을 가기 전에 그의 책을 보지 않았던 것은 장단점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잘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의 책을 먼저 보았다면 그가 보고 느낀 것, 그가 한 행동들을 은연중에 따라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보고 느낀 것, 내가 겪은 일들을 써 보고 싶었기에 필사적으로 그의 글을 읽고 싶은 욕망에서 달아나려 애썼던 것이다. 물론 그래서 그가 더 자세히 보고 깊이 느꼈던 것들을 무수히 놓쳤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무심코 지나쳤을 것들이 내게는 소중한 기억들이 되었을 것이라고 자위해 본다. 


나의 글은 여행 중에 틈틈이 메모하거나 지인들에게 보낸 글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그 거칠고 서툴고 때로는 오류가 뒤섞인 글들을 차분히 다듬어 보려 한다. 나와 가족들, 그리고 아주 가까운 이들이 讀者의 전부이겠지만, 부족한 부분은 좀 메꾸고 군더더기는 도려내고 거친 부분은 다듬어낸다면 읽을 만한 여행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김영하처럼 자신의 글을 읽고는 시칠리아 여행을 떠난 독자들은 ‘장담하건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호언할 수는 없다. 다만 시간이 흘러, 아직은 나의 망막 안에, 뇌리에 남아있는 그때의 풍경과 기억들이 희미해질 즈음 다시 들춰보면서, 내 생애에 시칠리아를 한 번 더 가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솟아오르기를 기대할 뿐이다.     

(아, 나는 이 여행기의 제목을 아직 정하지 못했다. 누군가 이 보잘것없는 글에 맞춤하는 이름을 지어주기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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