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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Feb 08. 2023

유년의 그늘-초근목피(草根木皮)의 체험

집집마다 가난을 계급장처럼 달고 살던 시절이었습니다.(누더기처럼 걸치고 살았다는 표현이 정확할지도 모릅니다.) 그 가난은 꾸밈도 없고, 꾸밀 것도 없는 아이들의 몰골과 행동에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했습니다. 나는 어릴 적에 굶어죽는 아이를 보지는 못했지만, 영양실조로 누렇게 부황이 들거나, 먹지 못해 못 자라는 아이들은 많이 보았습니다. 심지어 어린 우리는 초근목피(草根木皮)를 삶으로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이전에는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나이 드신 어른들이 ‘네가 무슨 그런 시절을 겪었느냐’며 웃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연명한다는 초근목피라는 게 옛날 소설에나 나오는 말이지 요즘 세상에 어디 있을 법이나 한 일인가요? 도시에서 사신 분들이라면 나보다 20~30년을 더 사신 분이라 해도 그런 경험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유년의 삶의 방식이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 조선시대의 그것에서 많이 나아가지 못한 것이었음을 안다면 이해할 것입니다.


사실 나 자신은 그렇게 배고픔을 경험한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 집이 밥을 굶을 정도까지 가난하지는 않았고, 또 우리 집의 유일한 아들인 내가 배를 곯아볼 ‘기회’는 더더욱 없었을 터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어울려 놀다 보면 그들이 하는 것을 자연히 따라 하게 되지요. 그것을 놀이 삼아 한 것인지, 정말로 배가 고파서 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어린 우리가 초근목피를 삶에서 실천(?)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춘궁기(春窮期)라는 말이 있지요.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햇곡식은 아직 익지 아니하여 식량이 궁핍한 봄철의 때’라고 국어사전에 나옵니다. 하궁기, 추궁기, 동궁기는 없고 오직 춘궁기만 사전에 실려 있는 것을 보면 예로부터 봄이 가장 배고픈 시절이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오죽하면 봄에 피는 꽃 가운데 조팝나무꽃과 이팝나무꽃이 있겠습니까? 하얀 저 꽃들이 모두 조밥이었으면, 쌀밥이었으면 하는 슬픈 판타지가 아닐는지요. 하지만 그 시절 굶주림에는 계절이 따로 없었습니다. 그나마 여름부터 가을까지는 무엇이든 먹을 것이 나오는 철이었지만, 겨울과 봄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초근목피 체험’이 겨울과 봄에 몰려있었던 기억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고봉으로 담긴 쌀밥을 연상케 하는 이팝나무꽃

겨울이면 아이들은 흙담을 등에 지고 양지쪽에 옹기종기 모여서, 연해 나오는 누런 코를 연신 훌쩍이며 놀다가, 벼랑 진 논두렁이나 밭두렁을 파헤치곤 했습니다. 그러면 통통하게 살이 찐 ‘띠뿌리(잔디뿌리)’가 나옵니다. 때로는 제법 길게 이어진 ‘왕건이’를 건질 때도 있습니다. 그 놈을 캐서 흙을 탈탈 털어 씹어 먹으면 달달한 물이 입안에 번졌습니다. 단 것이 너무도 귀하던 시절이었으므로 우리는 단 것만 보면 환장을 했더랬습니다. 어느 정도 띠뿌리 채취 작업이 이루어지면 그때부터는 아이들답게 놀이가 시작됩니다. 바로 ‘띠뿌리 싸움’이지요. 띠뿌리를 적당한 길이로 맞추어 자른 다음 서로 어긋나게 걸고 잡아당겨서 상대방 것을 끊으면, 땅을 파는 수고 없이도 초근(草根)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좀 나이를 먹은 형들은 산으로 올라가 칡을 캐거나 눈 덮인 산속에서 토끼나 꿩을 쫓곤 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머리가 크기도 전에 서울로 유학을 왔으니, 어릴 적에 그토록 동경했던 토끼사냥은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이 되었습니다. 아무튼 칡을 캐는 일은 어린 우리들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고, 어쩌다 형이 있는 아이들이 칡뿌리 한 토막을 들고 나오면 그 아이가 먼저 씹어 먹은 것이라도 다시 씹어 먹을 정도였습니다. 

띠뿌리(출처: 네이버블로그)

이제 목피(木皮) 차례입니다. 봄이 되면 뒷동산에 올라가 막 물이 오르는 소나무 껍질을 낫으로 벗겨 그 안쪽에 붙은 얇은 껍질을 씹어 먹었습니다. 씹는 맛은 거칠지만 꼭꼭 씹으면 거기서도 단물이 나왔지요. 또 소나무 끝에서 삐죽 자라난 새 가지를 잘라 껍질을 벗긴 다음, 연필처럼 가늘고 길쭉한 그것을 씹으면 달착지근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맛이 또한 싫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이런 경험은 우리들 자신이 견딜 수 없어 배가 고파서라기보다는 두어 살 위의 형들에게서 배운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들은 또 그 위의 형이나 부모에게서 배웠겠지요. 아무튼, 먹고 싶으면 언제든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요즘 아이들과 달리, 하루에 세 끼 밥을 꼬박꼬박 먹는 것이 어려웠던 당시 아이들에게는 분명 배고픔의 표현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초근목피의 ‘체험’은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우리 민족의 끈질긴 유전자가 시킨 일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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