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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Feb 04. 2023

흰샘의 漢詩 이야기-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화초도 없어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와도 도무지 봄 같지 않네.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허리띠 저절로 느슨해짐은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날씬한 몸매 때문 아니고말고.

                                                                                    <번역: 흰샘>     


당나라 때 시인 동방규(東方虯)의 <소군원(昭君怨)>이라는 세 편의 시 가운데 세 번째 시입니다. 5언시인지라 우리 전통 음보인 7·5조로 변역을 해 보았습니다. 당나라 때는 이백, 두보, 백거이, 맹호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유명한 시인들이 수많은 명작을 남긴 시기입니다. 그런데, 동방규라는 이름은 참으로 익숙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쟁쟁한 시인들의 어깨 근처에도 가지 못할 만큼 무명이었으며, 남아있는 작품도 얼마 없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 그중에서도 ‘春來不似春’ 한 구절은 천 년이 넘도록 인구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단 한 구절로 자신의 이름을 천고에 각인시킨 시인이지요.     


우리나라에도 히트곡 하나로 평생을 먹고 사는 가수들이 있습니다. ‘호랑나비’의 김흥국, ‘잊혀진 계절’의 이용 같은 사람들이지요. ‘잊혀진 계절’은 수십 년 동안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모든 방송사에서 한번쯤 내보내는 불후의 가요로 되어 있습니다. 또한 장범준이 부른 ‘벚꽃엔딩’은 해마다 벚꽃이 질 때면 사방에서 흘러나오는 명곡이지요. 오죽하면 ‘벚꽃연금’이라는 별명이 붙었겠습니까? 이 곡 하나의 저작권료가 평생 연금에 해당한다는 말이지요.      


다시 시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시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한(漢)나라의 궁녀로서 흉노족에게 끌려간 왕소군(王昭君)에 관한 작품입니다. 왕소군은 흔히 말하는 ‘중국 4대 미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왕소군이 흉노에게 바쳐진 사연이 기구합니다.     

미녀를 좋아하던 한나라 황제 원제(元帝)는 모연수라는 궁중화가를 시켜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오게 합니다. 황제 체면에 일일이 궁중을 돌아다니면서 미녀를 고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모든 궁녀를 운동장에 집합시켜 놓고 고를 수도 없는 일인지라 초상화를 보고 고르려고 한 것이지요. 그러자 궁녀들이 모두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칩니다. 자신을 좀 더 예쁘게 그려달라는 것이지요. 초상화가 예뻐야 황제의 눈에 띌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던 왕소군은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연수에게 뇌물을 바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저 있는 그대로만 그려달라고 도도하게 말한 것이지요. 모연수는 그것을 괘씸하게 여겨 왕소군을 못난이로 그리고 말았답니다. 황제가 수많은 궁녀들의 모습이 담긴 화첩을 넘기다가 왕소군에 이르러서 눈살을 찌푸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그런데 당시 한나라는 북쪽 오랑캐인 흉노족에게 번번이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나중에는 힘이 커진 흉노가 한나라를 심하게 압박했으며, 무리한 요구를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중 하나가 ‘황제의 여자들’인 궁녀 가운데 100명을 뽑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황제로서는 정말 분하고 쪽팔린 일이었지만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황제는 100명을 어떻게 선발했겠습니까? 당연히 화첩을 보고 못생긴 순서대로 100명을 골랐겠지요. 그중 1위가 바로 왕소군이었다지요. 아무려나 그렇게 선발(?)된 100명이 울며불며 궁정을 빠져나가는데, 황제가 그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봅니다. 아무리 ‘못생긴’ 궁녀들이라 해도 모두 자신의 여자인데 마지막 모습이라도 보려 한 것이지요. (참 찌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선 왕소군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와~ 저런 미인이 있었단 말인가? 그런데 왜 100명에 낀 거야? 쟤 누구냐?” “왕소군이라는 궁녀이옵니다.” “화첩을 대령하라.” 황제가 화첩에서 확인한 왕소군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황제는 노발대발하며 궁중화가 모연수를 잡아들이라 명합니다. 모연수를 심문한 끝에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황제는 모연수를 죽여 버리고 맙니다. (찌질함과 뒤끝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그 大國이 오랑캐한테 쩔쩔매지요.)     

왕소군(출처: 바이두)

한편, 흉노에게 끌려간 왕소군은 어찌 되었을까요? 당연히 그런 미인이 흉노의 왕인 선우(單于)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지요. 그녀는 흉노의 왕비가 됩니다. 그리고 한나라에서 배운 선진문물과 법도를 흉노에 스며들게 하여 흉노를 더욱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답니다. 그녀가 낳은 아들도 흉노의 왕이 되었다지요. 

해피엔딩인가요? 새드엔딩인가요? 그 찌질한 황제의 노리개가 되느니 일국의 왕비가 되었으니 해피엔딩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는 오랑캐에게 끌려간 왕소군이 한없이 가련하고 불행한 여인으로 생각되었겠지요. 왕소군과 관련된 수많은 작품들에서 모두 그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 시에서도 첫 구절이 오랑캐로 시작되니 말입니다. 아무튼 이 시에 나오는 ‘春來不似春’은 정말로 봄 날씨가 나쁠 때는 물론이고, 정치적인 상황이나 개인의 심정을 비유할 때도 자주 인용되는 명구가 되었습니다. 


오늘이 입춘(立春)이라지요. 게다가 정월대보름 전날입니다. 오후 들면서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것이 봄은커녕 아직도 한겨울 같아 ‘춘래불사춘’이 실감나기는 하지만, 시장에 나가보니 벌써 남녘에서 올라온 봄나물들이 푸릇푸릇합니다. 겨울이 봄을 이긴 적은 없으니, 봄 같지 않다고 해서 봄이 아닌 것은 아닙니다. 오늘부터 봄-1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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