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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Feb 01. 2023

당신의 롤모델은 누구입니까?

나이 50 넘어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는 날이었습니다. 물론 면접관들은 잘 아는 교수님들이었지만(한 사람은 선배, 또 한 사람은 한참 후배였음), 저는 어디까지나 입학을 하려는 학생의 입장이니 이것저것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지원한 이유’였습니다. 저는, 60이 다 되어 처음으로 과거에 합격한 ‘조선 최고의 돌머리’ 백곡(栢谷)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의 예를 들며 그가 저의 롤모델이라고 말했습니다. 김득신이 과거에 합격한 나이보다 한참이나 어린 제가 공부를 시작하기에 결코 늦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아무려나 백곡은 젊은 시절 머리가 아둔하였지만, 끊임없는 노력으로 뜻을 이룬 사람입니다.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아 ‘돌머리’가 되었다고 하는데, 보통 양반집 아이들이 대여섯 살이면 줄줄 외우는 천자문은커녕 열 살 때까지 글자도 깨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끈기’에 있어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합니다. 특히 글씨를 깨치고 나서는 독서의 즐거움에 익사 직전까지 빠지고 맙니다. 그의 독서 편력은 유명한데, 1만 번 이상 읽은 책만도 수십 권이 될 정도였습니다. 왜 그렇게 많이 읽었을까요? 당연히 그의 ‘돌머리’ 때문입니다. 아무리 읽어도 처음 읽는 것처럼 느껴졌다니 말입니다. 


<백이전(伯夷傳)>을 특히 좋아하여 11만 번 넘게 읽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요.(그의 독서기록장에는 1억1만8천 번 읽은 것으로 나오는데, 조선시대 1억은 지금의 10만이니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어느 날, 김득신은 종이 경마를 잡은 말을 타고 가다가 그 좋아하는 <백이전>을 외우기 시작했는데, 다음 구절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앞 구절만 자꾸 반복하자 말고삐를 잡고 가던 종이 얼른 다음 구절을 읊더랍니다. 백곡이 깜짝 놀라 “너 그걸 어찌 알았느냐?” 하자, 종이 하는 말. “나리께서 수만 번도 더 읊조린 것이라 쇤네도 다 외우고 있습니다요.” 그렇게 머리가 나쁘니 젊은 시절부터 과거시험을 보았지만 번번이 낙방할 수밖에요. 하지만 끈질기게 도전한 끝에 친구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난 59세에 드디어 과거에 합격합니다. 아마 수십 수 정도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낙방 횟수로는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합니다. 그걸로 따지면 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윤 아무개도 만만치 않지요.)     


다음 시는 김득신이 뒤늦게 이런저런 관직을 지내다가 낙향한 후에 지은 노년의 작품으로 보입니다. 백곡과 그의 시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시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제 나름으로 풀어봅니다. 백곡은 특히 당시(唐詩)에 심취했던 바, 그의 시풍 또한 다분히 당시에 가깝습니다. 특히 이 시는 함련(頷聯)과 경련(頸聯)에 쓰인 대우(對偶)가 섬세한지라 저도 최대한 대우를 살려 풀이해 보았습니다.      


山畔溪頭石作臺[산반계두석작대]      산기슭 시내 머리 바위는 누대인 양

登臨斜日兩眸開[등림사일량모개]      올라가 석양 보니 두 눈이 열리누나

詩因有興頻抽筆[시인유흥빈추필]      시로 흥취 일으키려 붓 자주 뽑아 들고

酒爲銷愁每把杯[주위소수매파배]      술로 시름 삭이고자 번번이 잔을 든다

客子夢魂京裏去[객자몽혼경리거]      나그네 꿈속 넋은 서울 향해 가건마는

故人書札峽中來[고인서찰협중래]      옛 친구 서찰은 골짝으로 오는구나

無端驚覺新春近[무단경각신춘근]      어느덧 새봄인가 시나브로 깨닫느니

積雪初融欲綻梅[적설초융욕탄매]      쌓인 눈 녹자마자 매화 망울 터지려네.     


제목이 <율협(栗峽)>이니 아마 그의 고향인 괴산 어디쯤에 있는 ‘밤나무골’ 정도 되는 듯합니다. 오늘 마침 청주에 사시는 ‘페친’ 한 분이 김득신의 이 시가 적힌 시비(詩碑)와 김득신 묘 사진을 올리셨기에 화답하는 의미에서 몇 자 적어드리고, 내친 김에 ‘브친’들께도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김득신 묘소(페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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