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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흰샘 May 10. 2023

열 번째 전주행

열 번째 전주행입니다. 3월초, 처음 가던 날이 생각납니다.


알람 소리를 듣고 일어난 때는 캄캄한 새벽이었고, 사당역을 들어설 때도 어둠은 걷히지 않았더랬지요. 용산역에 너무 일찍 도착해 한참이나 대합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TV를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열차가 한강을 건널 즈음에야 어스름이 걷혔습니다. 시속 200~300km로 스쳐가는 들판이며 언덕엔 아직 봄이 눈에 띄지 않았더랬습니다.


두 달이 지난 지금, 그새 봄은 가고 초여름이 되었습니다. 알람 소리에 눈을 뜨면 밖이 환해서 늦었나 싶어 화들짝 놀라기도 합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태양이 날마다 조금씩 제 시간을 늘린 덕이지요. 이제는 굳이 주방에 전등을 켜지 않고도 조심스런 '아침 혼밥'을 준비할 수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용산역에 7시면 도착합니다. 열차 출발 9분 전이지요.

열차를 타면 이미 천지에는 햇살이 가득합니다. 날은 맑지만 안개인지 미세먼지인지로 한강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유감입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로 시작되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저 유명한 <설국>의 첫 문장처럼, 도시를 벗어나자 온통 신록입니다. 황량했던 언덕엔 들꽃이 가득하고 야산에는 하얀 아까시아꽃이 주렁주렁 매달려, 격절과 차단 속에서도 달콤한 향기를 고스란히 맡을 듯합니다. 모내기를 앞둔 논마다 가르마 타듯 가지런히 써레질을 해 놓았고, 사흘을 두고 내린 단비로 논물도 맞춤하게 찰랑거립니다. 벼를 심어 쌀밥을 먹기까지 꼭 100일이 걸린다는데, 그렇게 고생하고 정성스레 키운 쌀은 제값을 받지  못합니다.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생산비와 인건비 정도는 안정적으로 보장하자는 양곡법을 우여곡절 끝에 마련했지만, 대통령은 단 한마디로 날려 버렸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자니 저 단정한 논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열차가 꼭 절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강의하면서 졸지야 않겠지만, 좋은 컨디션을 위해 잠시 눈을 붙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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