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발리에서 쏘아 올린 부메랑이 고스란히 돌아왔다.
퇴사 전날까지 일을 하다 발리에 떨어진 우리는 그야말로 무계획이었다. 이럴 때 알짜배기 정보를 얻으려면 뭐니 뭐니 해도 그 여행지를 대표하는 여행 카페가 최고다.
남편에게 발리 카페에 가입해서 정보 좀 찾아보라는 미션을 던지고, 정작 나는 침대에 누워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한참 카페를 들락날락거리던 그가 나에게 이것 좀 보라며 폰을 내민다. 뭔데?
<긴급 S.O.S! 저 좀 도와주실 분 있을까요? >
저는 지금 발리 한달살이 중인 대학생인데요,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핸드폰을 도난당했어요ㅠㅠ 부모님께서 한국에서 공기계를 보내주신다고 하는데 알아보니 배터리 때문에 항공 우편이 불가한가 봐요...(리튬 배터리는 불가하다고) 혹시 한국에서 발리로 들어오는 분이 있으면 배달해주시면 안 될까요?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평소 남편은 누군가를 돕는 일에 굉장히 발 벗고 나서기로 유명한 편이다. 뭐 좋게 말하면 자선가, 안 좋게 말하면 오지라퍼.
"그래, 이 학생이 어려움에 처한 건 알겠어. 근데 우리는 지금 발리인데 어쩌자는 거야?"
또 그놈에 오지랖이 발동하셨구나 하고 넘어가려는 순간,
"아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보라고 했겠어?
자기 친구 윤아 내일 발리 오잖아~ 친구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맞다. 내일은 내 친구 윤아가 발리에 오기로 한 날. 마침 내가 발리에 있는 기간과 윤아의 휴가 기간이 겹쳐 우리는 같이 맛집 투어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장 내일 퇴근하고 비행기를 타는 친구가 이 부탁을 들어줄 수 있을까? 나는 도저히 그건 아닌 것 같아 말리려고 했는데.... 남편은 이미 그 학생에게 연락을 해버린 뒤였다.
"이 학생한테 물어봤는데 부모님 댁이 마산이래. 윤아는 서울 사니까 그러면 마산부터 서울까지 핸드폰을 하루 만에 보내야 하는 거네."
경남 마산? 마산이라는 소리에 나는 이 건은 성사가 안 되겠구나 싶었다. 서울이어도 빠듯한 마당에 마산에서 어떻게 하루 만에 물건을 보내겠어?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고속버스 퀵이라고 들어는 보았는가. 학생의 부모님은 마산에서부터 서울까지 단 3시간 만에 배달이 가능하다며 바로 퀵 배달을 신청하셨다. 그렇게 내 친구는 하루 만에 핸드폰을 받았고, 우리가 있는 발리까지 무사히 들고 왔다. 이 모든 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제 막 한국에서 온 따끈따끈한 핸드폰을 전달하러 가는 길, 이상하게 마음이 설레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무슨 이유에선지 당사자가 직접 나오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친구가 작은 봉투와 함께 빼꼭한 쪽지를 전냈다.
아- 손글씨 편지를 받아본 게 얼마만이던가.
뜻하지 않는 곳에서 감동이 훅 왔다. 이 곳 발리에서.
**글쓴이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내용을 고스란히 올려본다.
안녕하세요 우선 정말 감사드립니다.
감사한 마음에 작게나마 사례를 합니다.
저는 예정보다 여행을 빨리 끝내고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살면서 제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발리에서 짧은 며칠간 폰 2번, 지갑 1번을 도난당해보니, 그냥 여기는 저랑 맞지 않는 곳이라고 생각하려고요. 그래도 인생 공부했다고 생각하려 합니다.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인데 자기 일처럼 도와주시는 거 보고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는 걸 느낍니다^^ 저도 앞으로 힘든 사람 있으면 지나치지 않고 도우며 살겠습니다.
남편은 발리에서 서핑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서핑에 관심이 없는 걸 잘 알아서, 혼자 수업을 들으러 비치에 가겠다고 했다. 부부라고 늘 같이 할 필요는 없으니까. 가끔은 따로 또 같이 행동하는 것도 좋다. 나는 나대로 혼자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얼마 후 남편이 돌아왔고 생각보다 빨리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아... 나 어쩌지..... 비치에서 폰 잃어버렸어.
잠깐 오토바이 위에 올려놓았는데 누가 가져갔나 봐..."
뭐? 오토바이 위에 올려놓았다고? 그건 그냥 가져가라는 소리다. 이곳은 동남아 최대의 관광지이고, 관광객의 수많은 휴대폰을 노리는 상습범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있을 뿐이고.
앞서 등장한 학생도 며칠 만에 두 번이나 휴대폰을 도난당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뿐 아니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패거리부터, 오토바이 날치기까지 유명한 곳이라고!!! 그러니까 이건 말 그대로 진짜 빼박이다.
거의 죽을상인 남편의 얼굴을 보니 왜 조심하지 않았느냐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곧 큰 도시로 넘어가니 중고로 하나 사고 잊어버리자고 그를 다독였다. 늘 머릿속이 복잡한 나와 다르게, 남편은 단순한 사람이라 도시를 넘어가면 잊을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는 새로운 장소에 도착했다.
발리를 떠나 인도네시아의 경주라는 '족자카르타'라는 도시에서 야시장을 가고, 사원을 가고, 맛집을 갔다. 다행히 예상대로 남편의 기분이 나아지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하루 일정을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곤 습관처럼 핸드폰을 열었다가, 나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어? 진짜로? 이게 말이 돼?”
내 SNS에는 외국인으로 추정되는 분에게 DM이 와있었다. 이름은 ‘Ayu(아유)’
그런데 그 DM 속에는 믿을 수 없게도 남편의 핸드폰 사진이 담겨 있었다.
what!!!!!!!!!!
우리는 꽤 긴 대화를 나눴고 사연인즉슨,
본인을 Balinese라고 소개한 아유는 오토바이 위에서 핸드폰을 발견했단다. 아유의 남편이 비치에서 1 시간 넘게 주인을 찾아다녔고, 근처 서핑 가이드들에게도 묻고 다녔는데 끝내 찾지 못했다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열어보니, 우리의 결혼사진이 떡하니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진 속의 여인인 나를 남편의 SNS에서 찾아내었다고 한다. 아마 최근 검색에 내 아이디가 있었거나, 자주 보는 계정이 상단에 떴기 때문인 듯한다. 그리고 정확히 나에게 DM을 보낸 것이다. (정보를 찾기 위해 핸드폰을 본 부분에 대해서는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셨다. 미안하긴요.)
아유는 핸드폰은 안전하게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우리가 있는 곳을 물었다.
이미 도시를 넘어온터라 발리까지 비행기로는 1시간 40분, 버스로는 꼬박 1박 2일이 걸리는 거리다. 남편이 비행기표를 알아보고 가겠노라 했지만, 아유는 항공우편으로 직접 보내주겠다는 친절함을 베풀었다. 세상에!
그저 상습범들만 생각하며 진작 마음을 접었는데 이토록 선량한 현지인을 만났다니.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빠져도 푹 빠진 내가 부끄러웠다.
바로 다음날, 아유는 항공우편을 접수했다는 인증샷을 보내주었고, 얼마 후 물건은 비행기를 타고 우리 앞에 무사히 도착했다.
집 나간 탕자를 맞는 아버지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핸드폰을 탕자에 비교하기 뭣하지만, 핸드폰이라는 대체불가 존재감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특히 타지에서 더욱.
남편은 살아 돌아온 핸드폰을 쥐고 오랫동안 놓지 않았다. 감격스러워하는 남편을 보니 나까지 괜히 뭉클했다. 그리고 남편은 물었다.
"근데 발리에서 그 학생 말이야, 그때 안 도와줬더라도 과연 이 핸드폰이 멀쩡히 나에게 돌아왔을까?"
"음...아니? 그때 당신의 판단이 기가 막혔지!
이제 아유 그 친구가 돌려 받을 차례야"
그날 밤 우리는 이야기했다.
잠깐 왔다가는 인생, 부메랑처럼 살아야겠다고.
그렇다. 결국에는 돌고 돌아 나에게 오는 것이 인생이란 걸 우린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동안 나는 어떤 부메랑을 날렸을까? 아니 그보다 앞으로 무엇을 날릴 것인가 하는 것도 전적으로 나의 몫이겠지! 더욱이 이렇게 먼 땅에서 몸소 겪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