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병 환자가 전하는 질병 기록 에세이 (8)
(브런치 글을 쓰는 건 주로 하루 or 이틀이 걸리는데, 이 글을 써놓고 또 약 먹는 걸 잊어버렸다. 젠장. 그래서 다음 첫 문장은 생각보다 가볍게 썼으니 이해해 주시길. 사람은 실수하는 법이다. 어쩌구 저쩌구 변명을 해본다.)
나는 약 먹는 걸 잊어버리지 않았는데, 하필 공휴일이 있다는 건 잊었다. 촤하하. 최근 들어 바쁜 일이 있다 보니 날짜를 잘못 계산했다. 한 4일 정도 안 먹었다. 금요일에 공휴일이 끼어있다는 걸 잊어서 새 약 받는 게 늦었다. 약을 이렇게 길게 안 먹어 본 게 오랜만인 것 같다. 물론 훨씬 장기적으로 복용하지 않은 적도 있지만, 요새 들어서는 참 오랜만의 일이다.
알약이라 입에 머금고 있으면 가끔 약의 맛이 느껴지는데, 내 약의 경우 쌉싸름한 느낌의 맛이 느껴진다. 그걸 조금만 참으면, 물과 함께 천천히 삼켜진다. 나는 이 느낌이 느낄 때마다 새롭다.
잘하면 공휴일이 끝난 다음 날에 바로 약을 받을 수 있었는데 저번 주 토요일 건강검진에 가느라, 챙기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주변에서 나를 안 도와줬다. 이건 좀 화내도 되겠지? 원래도 강단 있게 오전 진료하는 병원에 들러 약을 받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대기가 길어져서 못 먹었다. 나도 참 우유부단한 게, 진즉에 양해를 구하고 병원에 다녀오면 되는 건데 그러지 못했다. 좀 더 맘 잡고 약을 타와야 하는 거였다! 하지만 못했다!
흔히 약을 먹지 않으면 드라마틱하게 상태가 나빠진다거나 그런 반응이 나올 수 있겠으나, 나 같은 경우에는 일정 시간 동안 약을 먹지 않아도 증상이 발현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약을 한 달 이상 안 먹었을 때가 진정한 위기다. 그때쯤 되면 정신 없어지고, 무엇보다 환청과 환시가 심해지기 때문에 다시 빠르게 약물치료에 들어가야 한다. 왜 이렇게 잘 알고 있냐면 자주 이런 식으로 ‘어 괜찮은데? 약 안 먹어도 되겠는데?’ 한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고 한 이틀 정도 약을 안 먹는다고 해서 엄청난 일이 발생하지는 않지만, 완치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은 사실이다. 안 그래도 대학병원 정신과에 다녔을 때는 약을 하루도 빠짐없이 10년 복용해야 완치 판정을 받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었다. 그런 얘기를 들었는데, 4일 빼먹은 거면 엄청난 일이다. 앞으로 약 좀 다시 잘 챙겨 먹어야겠다. (라고 이 글을 써놓고 당일의 약을 빼먹고 말았다.)
뜬금없지만 요새 영화 벽돌 깨기하고 있다. 제일 만만하지 않았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보고 싶어졌다. 사실 나는 그의 수많은 필모 중에 <헤어질 결심>을 제일 열심히 보고 나머지는 거의 졸면서 봤다. 그래서 <올드보이>도, <친절한 금자씨>도 부분 부분 강렬했던 장면만 기억나고 내용 자체는 하나도 모르는 상태. 그래서 복수 시리즈를 벽돌 깨기 해야겠다 싶었다. 처음부터 <복수는 나의 것>을 시청했다. 그걸 보고 나니까 ‘정신 나갈 것’ 같았다. 이미 정신 나갔는데 정신이 나갈 것 같다는 건 뭘까. 괜히 이런 말 해보고 싶다. ‘너무나 사적인 고통’을 낱낱이 파헤치는 바람에 ‘시청자 또한 그 고통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검색해 보니 <복수는 나의 것>을 시작으로 복수 시리즈가 있다고 했다. 그다음은 <올드보이>고 마지막이 <친절한 금자씨>였다. 나는 세 작품 모두 좋진 않았고, 점점 세련되어지는 복수의 방법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긴 했다. 세 작품을 연달아 보니 복수는 금방 해서는 안 되고, 한 십 년 정도 기회를 노리다가 웬만한 자료도 전부 수집되었을 그 시점에 해야 파급력이 크다, 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연 인생에서 쓸 만한 정보일까. 싶기도 하지만, 내가 느끼기로는 그랬다.
나도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내 환청에 관해서 설명하지 않을 수가 없겠다. 이 환청은 근 십 년 간 나를 괴롭혀온 원흉이자 내가 만들어낸 생각의 중추다. 이놈은 나에게 전국민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었는데, 이것에 대해 설명하는 게 머쓱할 정도로 나는 이놈에 대해서 잘 모르기도 하고, 그런데 내가 만들어낸 거라 내가 제일 잘 알아야 하는 상황이다. 나는 이놈에 대해 잘 모르는데, 이놈은 지구인들이 무언가의 정신간섭신호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들에게 벌을 준다고 믿었다. 나는 그 간극 안에서 호흡하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외쳐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나에게 약이라는 구원자가 도착했다. 비록 이것도 약이라, 자주 복용하는 게 힘들긴 하지만 몇십 년 간 나를 괴롭혀온 환청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메리트가 있었다.
약을 잊지 마. 그 말이 오늘 내가 깨달은 가르침이자 오늘 나만의 교훈으로 삼겠다. 나는 그 외에 복수하고 싶은 인간은 딱히 없다. 물론 첫 병원에서 처음에 나의 담당 의사가 너무 고지식하고 내 얘길 잘 안 들어준다 싶었는데, 지금은 그저 고맙게 느껴진다. 그리고 나도 돈을 내면서 본인의 치료에 일조하고 있으니 너무 야박하게 굴지 않아도 될지도. 그런 생각을 하는 요즘이다.
약을 잊지 마. 중요하니까 한 번 더 쓰겠다. 약이란 건 먹을 때로서야 중요해진다. 그리고 약을 먹어야만 증상은 좋아진다. 그것도 엄청나게 꾸준함을 요구하는 상당히 어려운 퀘스트 중에 하나이다. 하지만 이것을 하루하루 적축시키다 보면 평화가 온다. 나는 그 평화를 이미 누려버려서 그 바깥으로 나가는 게 싫다. 약을 안 먹고 버티는 사람을 보면, 당장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시간을 축척하여 괜찮아지길 바란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설령 그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이 그곳에 쏟은 시간만큼은 정확하게 당신이 당신을 케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나는 이 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지침이란 것은 무릇 일직선일수록 지루해지지 않는가? 그러니 당신에게도 정신없는 약물의 나날을 겪어보시기를 심심하게 권유하여 보는 것이다. 물론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