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병은 극복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조현병 환자가 전하는 질병 기록 에세이 (10)

by 아픔

오래간만에 환청이 들렸다. 본래 약을 잘 먹고 있으니 들릴 리가 없는 게 맞을 텐데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내 귀에 들려왔고, 나는 소리가 난 곳을 눈으로 좇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단순한 착각일 수도 있겠으나 예전에 듣던 환청과 너무 비슷했고 나는 금세 얼어붙어 그 실체를 찾아 주변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낯설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여졌다. 처음으로 나에게 들리는 환청을 지각했을 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그때, 내가 느끼던 것들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내가 듣고 느끼는 게 굉장히 사실적으로 다가왔고, 그것을 실화하면서 주변인을 대했다. 그래서 주변인들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내가 하는 행동이 때로는 이치에 맞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내가 주로 듣던 환청은 누군가 떠드는 소리, 날 감시하는 듯한 목소리를 들어왔다. OO아 공 차야지, 라든가. 너는 감시당하고 있으며, 너를 해할 사람이 주변에 가득 있다. 이런 말을 들어왔다. 나는 그게 실재한다고 믿었었고, 그것을 착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환청이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그 사실을 안 뒤로 다소 어렵게 살아왔다. 현실 감각과 환청의 구분을 위해서, 나는 노력하며 스스로를 돌아봐야 했다. 그 과정이 험난했지만, 막상 오르고 보니 별것도 아닌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제는 너무나 당연해서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약이 안 들었나. 저번에 약 4일 치를 놓친 것에 대한 안 좋은 시그널인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전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것에 대해 늘 불온하게 여겨왔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는 것인데, 이건 나만 겪을 수 있는 나만의 감각이기도 한 셈이다. 오로지 내가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것. 나는 이 특별한 것을 장점 삼아 나의 상상력을 기반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글을 쓸 때 많은 요건을 필요로 하지만, 이처럼 나의 감각이 필요시 되는 것은 무척 반가운 소식이다. 오히려 정신병을 이용해 내가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니까.


오늘은 극복이라는 말이 싫다는 기호성에서부터 글을 시작해 볼까 한다. 극복이라는 말은 그다지 쓸모 있는 명칭은 아닌 것 같다. 조현병을 극복하다. 라는 말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 나도 병세가 많이 좋아진 편이지만, 극복이라는 단어를 보면 이맛살이 찌푸려진다. 이만큼 무의미한 말이 어디 있을까? 애초에 극복가능한 게 도대체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나는 극복이라는 단어가 가진 ‘지나친 긍정’을 의심하곤 한다. 닉 부이치치가 생각난다. 장애를 극복하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그를 추앙하던 글들이 내게는 그렇게 어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마 어렸을 때도, 그의 영상을 보면서 장애에 관한 생각을 달리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극복이라는 말로 바꿔 표현하는 것은 꺼려졌다.


나에 대한 혐오. 내가 가진 ‘나’를 싫어하게 되는 마음은 평생 같이 존재하는 것이다. 극복이라는 말로 한정적으로 괜찮아질 수도 있겠으나, 어김없이 당장 내일이라도 ‘내가 싫어질 수 있’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다음 날이 되는 것만으로도 내가 싫어질 수 있는데, 과연 극복이라는 말이 이런 데 필요한 걸까? 남에게 보기 좋게 내가 나아졌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함정의 말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응, 극복했어.”


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단지 조금씩 나아지고 있을 뿐이니 말이다. 나는 이 과정에도 이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결과 말고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이 이럴 때 쓰는 말일 수도 있겠다. 과정. 그래,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결과를 중요시한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진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마음가짐의 변화부터 시작해서, 또 다른 프로젝트를 파생시키기도 한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은 널리 알려져 있긴 하지만, 마음에 와닿는 표현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극복 말고 어떤 단어를 쓰면 좋을까. 이에 관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나는 ‘호전됐다’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병세가 호전됐다. 이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러닝 심박수 그래프처럼 굴곡을 가지면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나는 이 표현이 훨씬 나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입원 치료에서 퇴원한다는 개념에는 ‘극복’이 어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퇴원은 ‘완치’라고 보기엔 어렵고, 극복의 사전적 의미로서는 어느 정도 상응하는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과정이 다소 불필요해 보이긴 하나,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보고 있다.


정보의 필요한 부분만 취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그다지 좋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인간은 원래 복잡한 것이라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가진 생각들을 숨기지만 않으면, 주변인들과 의견을 나누고 조금은 둥글어질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이런 생각을 확립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이런 특성이 있고, 그 특성을 이루는 단어 중 일부에 해석을 부여하여 조금은 다르게 기억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을 아주 조금씩,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글 하나를 완성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게 된다. 나는 이 모습이 싫지가 않고, 오히려 반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약을 먹기 전에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이니까. 그런 의미애서 새 삶을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나라는 악기가 변화한다는 사실은 덤으로 느끼게 되었다. 나는 이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임을 느끼게 되었다. 그게 성실한 내가 현대를 살아가는 방법 같다고 느끼게 되었다.


마지막은 늘 읽는 이의 건강을 기원하면서 맺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르게 마무리를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엔, 당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하나의 가능성으로 봐주셨으면 좋겠다는 염두의 말을 남겨볼까 한다. 내가 가진 ‘극복’은 이러한 의미로 자리 잡아 있다고, 당신에게 말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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