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영혼의 따끈한 차 한 잔

by 낮은자리 수니

하루아침에 암환자가 되고 보니, 갑자기 자리가 낯섭니다. 진단을 받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런저런 징후들이 있었지만, 사실 일상생활에서는 크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암환자가 되었거든요. 전공의들이 파업하는 상황 등 어려운 시기인데도 운이 좋게 빠르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고 암환자 된 것입니다.


내 경우는 많이 아프지도 않고, 외관상 살이 좀 빠진 것 빼고는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암환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터무니없는 두려움이 불쑥 찾아들기도 하고, 또 무언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서 좀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대학 병원에서 대동맥 방사선 색전술이라는 표준치료를 잘 받았고, 주치의 선생님은 약 잘 먹고 3개월마다 살펴보자는 말씀 외에는 별말씀이 없었습니다. 몸을 무리하지 말라는데, 어느 정도가 무리인 것인지는 상당히 주관적인 판단이어서 영 기준이 서지 않았습니다.

SNS에서는 알고리즘을 타고 시시각각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지고, 그 정보들은 모두가 그럴듯한데 서로가 아주 상반된 내용이기도 해서 더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주변인들도 뭐가 좋다더라, 뭐를 하면 안 된다더라 도무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막연했지요.


우선은 요양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병원에 입원하는 것은 꺼려졌습니다. 지금까지 지인들의 병문안으로 들러봤던 병원들을 생각하면 없던 병도 생길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도무지 입원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의사인 지인에 자문한 결과, 요즘은 암환자 전문 요양병원이라는 데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을 눈감고 살았나, 돌아다니면서 그런 병원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암환자에 맞춘 식사와 암 치료 후 면역관리 등 암환자만을 위한 요양병원을 소개받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암 전문 요양병원은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최신식 시설의 병원이었습니다. 지하철 역세권에 자리하고 있어 교통도 좋았고, 병원이라기보다는 고급 호텔처럼 럭셔리한 분위기였습니다. 원장 선생님도 최대한 환자들이 병원처럼 느끼지 않도록, 조명 하나, 벽에 걸어둔 그림 하나도 다 신경 썼노라 하셨습니다.

벽 전체를 차지한 커다란 그러나 따뜻한 느낌의 그림. 은은한 조명. 잔잔한 음악. 넓고 안락한 소파. 과연 병원 로비는 근사한 호텔 로비 같았습니다. 안락한 소파에 앉아 눈앞의 그림을 감상하며 진료 상담을 기다리고 있는데 직원이 차 한 잔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찻잔을 받아 들고 울컥, 콧등이 시큰했습니다. 고급스러운 찻잔에 조심스럽게 받쳐 들고 와서 건네준 김이 모락모락 오르던 오미자차 한 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없이 많은 차를 끓이고 따르고 했겠지만, 나를 위해, 나의 영혼과 몸을 위해 언제 이렇게 우아한 찻잔에 따끈한 차를 끓여 본 적이 있었나. 음악에 귀 기울이며 마셔본 적이 있었나. 그 향기와 맛을 음미하며 마셔봤던가.


버티듯, 투쟁하듯 살아온 지난 시간. 가장 나중까지 양보하고 혹사해 왔던 나 자신. 이제 병들어 가족들에게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한편 육십 년이 넘도록 스스로를 돌보지 않았던 시간이 후회로 몰려들었습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자주 그때 따뜻한 오미자차 한 잔이 자주 떠오릅니다. 때론 차 한 잔이 어떤 위로나 치료보다 더 치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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