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병장수가 아니라, 일병장수

오늘도 내 몸과 함께 걷는다.

by 낮은자리 수니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

건강이 최고다.

건강하기만 하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은 것이고, 사람을 잃으면 많이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은 것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자신의 건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살아가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 역시 건강은 타고난 것인 줄 알았습니다. 태생이 금수저도 아니고, 미인으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저 하나 얻어걸린 복이 건강인 줄 알았습니다. 평소에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파서 가족들의 관심을 좀 받았으면 좋겠는데 도무지 아프지를 않았어요. 두 살 터울 위 언니가 자주 아파서 자리에 눕는 것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청소년기에는 ‘라스트 콘서트’라는 영화에 열광했는데, 백혈병에 걸려 파리하게 죽어가던 여주인공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혈액암 환우들께 죄송합니다.) 사실 여배우의 아름다움은 백혈병과는 무관한데도 말입니다.





타고난 건강체라서 일하는 것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몸을 쓰는 일을 힘들어하지 않았고, 또 열중하게 되면 밤을 새우는 것도 좋아했습니다. 밤늦도록 깨어있으면 어쩐지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뿌듯하기도 했고, 대체로 독서나, 글쓰기는 낮보다는 밤에 집중이 잘되기도 했고요. 하루에 3~4가지의 서로 다른 일들을 해가면서도 힘들다기보다는 어떻게든 해낸다는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병이 나기 전 해, 그러니까 암이 발견되기 불과 3개월 전. 그 해 10월, 11월 12월 3개월 연속해서 책을 출간했습니다. 지역 어르신들과 6개월 동안 진행했던 자서전 쓰기 강좌가 마무리되면서 책을 출간하여, 10월 23일 출판 기념회를 했고, 11월에는 역시 1년 동안 지역 중학교 학생들과 진행했던 ‘1인 1 책 쓰기’ 프로젝트의 마무리로 책을 출간했습니다. 12월에는 혼자서 자료수집부터, 관계자 인터뷰 진행까지, 자료 분류와 배치 등을 하며 지역 축제에 대한 원고를 쓰고 편집까지 마무리해야 했습니다. 갑자기 생긴 프로젝트여서 짧은 시간 동안 축제 아카이브를 위한 책을 출간해야 했습니다.


책을 만드는 일을 하는 전문가도 아니고, 경험이 많은 사람도 아니지만 힘들게 긴 시간 수업을 통해 함께 쓴 글들을 그저 놔둘 수가 없어 용을 쓰며 교정과 윤문, 나름의 편집을 해서 출판사에 넘겼지요.


대략의 업무만 보더라도 살인적인 일정이었습니다. 그렇게 12월을 보내고 나서 이제 좀 쉬어보자 하고 여유를 가져보니, 몸의 변화가 느껴졌습니다.


사실 그렇게 일을 하면서 아침부터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들거나, 컴퓨터 자판 위로 느닷없이 쏟아지던 코피, 손바닥 발바닥 종아리 등 여기저기 이유 없이 들어 있던 멍 등 전조 증상들이 있었지만 무심히 넘겼습니다. 아니, 일이 급하니 신경 쓸 새가 없었지요. 그러다가 일정이 다 끝나고 나니 몸살감기 증세가 생기더니 영 나아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감기 몸살로 어디 나가지도 못하고, 일들도 다 마무리한 참이라서 방 안에서 뒹굴거리며 책이나 읽다가, 졸다가 하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SNS에 건강 관리협회에서 보낸 광고가 보였습니다. 연말에는 복잡하니, 연초에 건강검진을 받으면 좋다는 안내였습니다. 맞는 말이라고 금방 공감한 것이, 저는 그때까지 항상 12월 30일이 다 되어 부랴부랴 동네 가장 가까운 병원 가서 간단히 건강검진을 받았었습니다.


그런데 나이도 먹었고, 그런 저런 증상들도 보이니, 그 광고가 눈에 쏙 들어왔던 겁니다. 그렇게 좀 정밀한 검진을 받을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암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 순간에 암환자가 되고 보니, 다 나쁘지만은 않은 것이, 나의 몸 상태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고, 회복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게을리했던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게 되고, 몸에 좋은 음식을 가려 먹게 되고, 일찍 자고, 무엇보다도 일을 정리하고.....


가끔 지인들에게 하는 말인데 ‘내 몸을 모시고’ 사는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60 평생을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듯이 내 몸을 가장 나중에 생각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데 이제 그 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시간을 느리게 쓰고, 안 되는 일을 억지로 하려고 들지 않고, 천천히 먹고, 부지런히 운동하고.


그렇게 보면 무병장수가 아니라 병 하나 있어 오히려 장수하게 되는 것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떤 친구는 ‘너 그러다가 200년 살겠다’고 덕담인지 악담인지 말합니다. 암튼 약점이 오히려 보완을 하면서 더 큰 강점이 되게 된 것이지요. 어지간해서는 바꾸기 힘든 수십 년 된 여러 습관들을 병이라는 임팩트 큰 이벤트가 한 번에 바꿔 삶의 물꼬를 틀어준 것입니다.


그러니, 무병장수가 아니라 일병장수.

병 하나 지니고 사는 것에 고마워할 일이 아닐까요?